남자 100m 개최국 티켓 뛰지도 못하고 ‘반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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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호 06면

역시 볼트  살살 달려도 1위 우사인 볼트가 달구벌을 달궜다. 27일 밤 대구 스타디움에서 열린 남자 100m 예선 6조에 출전한 볼트는 10초10의 기록으로 가볍게 1위를 기록하며 준결승에 진출했다. 준결승과 결승은 28일 열린다. 스타트부터 치고 나온 볼트는 75m 지점부터 속도를 늦추는 여유를 부렸다. 은색 스파이크를 신고 4레인에 나선 볼트는 자신의 모습이 전광판에 비치자 쌍권총을 쏘는 동작을 하며 쇼맨십을 과시하기도 했다. [대구 AP=연합뉴스]

육상의 하이라이트이자 꽃은 100m다. 세계인의 관심과 이목이 집중돼 있다. 그런데 한국은 여전히 정상급 선수들과 겨룰 실력을 갖추지 못한 채 변방을 맴돌고 있다.

2011 대구세계육상

남자 100m 한국기록 보유자인 김국영(20·안양시청)은 뛰어보지도 못하고 탈락했다. 김국영은 27일 대구스타디움에서 열린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남자 100m 자격예선에서 부정 출발로 실격당했다. 이번 대회 사진 판독관을 맡은 장재근 대한육상경기연맹 이사는 “육안으로도 김국영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며 “스타트 블록에는 발의 압력을 체크할 수 있는 센서가 부착돼 있다. 심판이 실격을 선언하기 전 이미 센서가 울려 김국영의 실격을 알렸다”고 말했다.

김국영은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려 선글라스를 썼지만 이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한참 뒤에야 마음을 진정시킨 김국영은 “욕심 때문에 성급해졌다”고 말했다.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던 모양이다. 맑은 날씨에 뒷바람이 부는 등 모든 조건이 좋았고 컨디션도 괜찮다고 판단한 김국영은 무리하게 한국신기록에 욕심을 내다 일을 그르쳤다. 그는 “자격예선은 그냥 뛰고 사실상 다음 경기부터 뛴다고 마음을 비웠는데도 성급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400m 계주에 초점을 맞춰 100m 훈련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한국에서 나 혼자 나가기 때문에 열심히 뛰려 했다”는 김국영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김국영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한국 육상의 현주소를 그대로 드러낸다. 김국영을 비롯해 여호수아(24·인천시청), 임희남(27·광주시청) 등 100m를 주종목으로 하는 선수들은 이번 대회를 앞두고 400m 계주 훈련에 온 힘을 쏟았다. 남의 잔치가 되지 않게 하려고 ‘선택과 집중’을 한 것이다. 그러나 개인기록 자체가 세계 수준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데 400m 계주에서 단기 과외로 ‘톱10’을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였다.

한국 남자 단거리 선수들은 세계선수권에 출전할 수 있는 기준기록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러나 주최국 어드밴티지로 종목별 1명씩 출전이 가능해 김국영이 티켓을 얻었다. 세계선수권에는 A 기준기록을 통과한 선수는 국가별 3명, B 기준기록을 통과한 선수는 국가별 1명이 출전할 수 있다. 남자 100m는 A 기준기록이 10초18, B 기준기록이 10초25다. 김국영이 세운 한국기록은 10초23이다. 자신의 최고 기량을 발휘해야 B 기준기록을 넘을까 말까다.

현재 남자 100m는 자메이카가 독주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세계기록(9초58) 보유자인 우사인 볼트(25·자메이카)는 2009년 베를린 세계선수권 3관왕을 차지하며 지존의 자리에 올랐다. 볼트는 2008년 아사파 파월(29·자메이카)이 보유한 세계기록(9.74)을 0.02초 앞당기며 정상에 올랐다. 이후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9초69를 기록했고 2009년 베를린 대회에서 9초58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타이슨 게이(29·미국)와 파월 등이 볼트를 뒤따르고 있다. 게이와 파월은 부상으로 이번 대회에 출전하지 않았지만 내년 런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바라보고 있다. 요한 블레이크(22·자메이카)는 이들을 위협할 복병이다.

미국이 지키고 있던 단거리 최강 자리를 2000년대 들어 자메이카가 빼앗았다. 자메이카는 1960년대 데니스 존슨이 미국 대학의 체계적인 훈련 방식을 그대로 옮겨왔다. 자메이카공대에서 이를 토대로 선수들을 육성해 수많은 단거리 선수들을 양성했다. 한국 선수들은 이들의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 2009년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후진적인 시스템은 단기간에 달라지기 어렵다.

자메이카 대표팀 코치 출신으로 2009년 한국 선수들을 가르쳤던 리오 알만도 브라운(55)의 한마디는 새겨들을 만하다. 그는 “한국은 육상선수의 천국”이라고 말했다. “열심히 훈련하지 않아도 대표선수가 될 수 있고 풍족한 월급을 받는 한국의 시스템이 문제”라는 설명이다. 기록에 도전하지 않아도 전국체전에서 입상하면 월급에다 상여금까지 나오니 세계와 경쟁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나마 정혜림(24·구미시청)이 희망을 던져줬다. 정혜림은 여자 100m 자격예선에서 11초90을 기록해 4조 1위에 올랐다. 개인 최고기록인 11초77에는 0.13초가 모자랐다. 그러나 한국 선수들의 선전을 기원하는 홈 관중은 큰 박수로 격려했다. 정혜림은 “초반에 실수가 있었다. 내일 진짜 잘하는 선수들과 겨룰 때는 흔들리지 않고 내 페이스대로 뛸 수 있도록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홈 관중이 응원해 주시니 더 편안하고 힘이 나는 것 같다”며 밝게 웃었다.

정혜림은 세계육상선수권대회 100m에서 두 차례 이상 트랙을 밟는 유일한 선수가 됐다. 여자 모명희(1983년 헬싱키)와 남자 진선국(91년 도쿄, 93년 슈투트가르트), 이형국(97년 아테네)이 세계선수권에 출전했으나 모두 첫 번째 레이스에서 탈락했다. 정혜림도 기준기록을 통과하지 못했으나 주최국 어드밴티지로 출전 기회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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