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배 빠른 ‘차세대 인터넷' 2004년 국내 첫선

중앙일보

입력

2005년 5월14일 저녁 서울 마포 S아파트.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K아무개씨는 디지털 TV를 켜고 미국 뉴욕에 있는 여자 친구 L아무개씨에게 화상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L씨의 생일. L씨는 K씨가 3차원 인터넷 쇼핑몰에서 사서 보낸 옷과 반지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인터넷 사용자가 늘면서 생활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정보검색에서 쇼핑은 물론 오락에 이르기까지 생활의 많은 영역들이 사이버 공간으로 옮겨졌다.

인터넷의 발달은 또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기술에 머물지 않고 가치관을 비롯, 정신적인 부분의 변화도 몰고 왔다. 사회의 패러다임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런 변혁의 주인공인 인터넷에도 아직은 한계가 많다. K씨와 L씨가 동영상을 보며 자연스레 대화를 나눌 만큼 속도와 품질이 뒷받침되지 않는다. 또 전자상거래가 붐을 이루고 있지만 보안 문제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고 올해부턴 주소 부족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4~5년 뒤 차세대 인터넷이 선보이면 이런 걱정은 접어 둬도 될 듯하다. 지금보다 1천 배나 빠르고 보안·품질·주소 등의 한계를 뛰어넘는 차세대 인터넷 개발이 한창이기 때문이다.

차세대 인터넷이란 기존 인터넷의 문제점을 개선해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연구·개발을 일컫는다. 지금의 인터넷보다 1천 배 빠른 속도와 품질(QoS;Quality of Service) 보장 등으로 신뢰성 있는 인터넷을 만들려는 네트워크 개발과 테스트 베드(시험망) 구축 그리고 차세대 인터넷에서 제공되는 응용서비스를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다.

사실 미국·캐나다를 비롯, 차세대 인터넷 프로젝트의 종주국에서도 차세대 인터넷이 뭐냐에 대해선 명확한 정의를 내리진 않고 있다. 다만 지금의 인터넷이 안고 있는 기술적 문제점을 극복하고 고도의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차세대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 무엇보다 월드와이드웹(WWW)이 ‘세계적 느림보’(월드와이드웨이트)라는 오명을 씻게 될 것으로 보인다. 정보통신부는 인터넷 속도를 지금보다 1천 배 끌어올리기 위해 올해부터 3년간 차세대 인터넷 기술 개발에 1단계로 1천1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정통부는 2004년까지 테라급(1테라는 1백만Mbps) 인터넷 전송·사용기반을 구축한다는 목표다. 1테라는 1천기가(1기가는 1천Mbps)에 이르는 속도. 1기가의 속도만으로도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33권 모두를 3초 안에 전송할 수 있다.

미국은 지금보다 1천 배 빠른 인터넷을 2002년까지 구축한다는 목표.

미국 정부는 이를 위해 해마다 1억 달러씩 투자하기로 했다. 고속으로 무장한 차세대 인터넷은 특히 지구촌 구석구석에 디지털 신경망을 깔아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지구를 하나로 연결한다는 미국의 ‘메가넷’ 구상에도 중심적인 역할을 할 전망이다.

영국 정부도 1억 파운드(2천억원)를 들여 ‘슈퍼 고속인터넷’을 개발할 계획이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에 따르면 ‘그리드’(GRID)로 알려진 슈퍼 고속인터넷으로 지금처럼 고통스럽게 기다리지 않고 몇초 내로 세계 어느 곳에서든 정확하게 정보를 수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 계획은 오늘날 상업적 인터넷의 기본이 된 월드와이드웹을 10년 전 개발한 제네바 부근 유럽분자물리학센터(CERN)와 손을 잡고 추진된다.

차세대 인터넷의 도메인 체계(IPv6)는 인터넷 주소를 거의 무한대로 부여할 수 있다. 주소 공간을 기존 32비트에서 1백28비트로 확장하는 것. 이렇게 되면 가전제품이나 기계에도 인터넷 주소를 부여할 수 있어 인터넷으로 원격조종할 수 있게 된다. 홈뱅킹과 홈트레이딩, 홈쇼핑 등이 제대로 자리를 잡고 사업자에게도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무한한 비즈니스 기회가 주어진다.

차세대 인터넷은 또 영상·음성 등의 정보에 대한 품질(QoS)도 보장해 준다. 차세대 인터넷을 고성능 인터넷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속도 뿐만 아니라 품질 등의 문제도 해결하기 때문이다. 차세대 인터넷은 데이터에 따라 속도의 완급을 조절, 한정된 대역폭에서 다양한 서비스를 구현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디지털 TV를 비롯, 영상을 담은 쌍방향 서비스에 적격일 것이란 전망이다.

차세대 인터넷은 기존 인터넷이 그랬듯 생활 구석구석을 바꿔나갈 전망이다. 먼저 사이버 공간으로 방향을 돌리고 있는 경제활동의 이동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속도와 보안문제에 대한 걱정이 줄어 전자상거래가 경제활동의 중심에 자리잡을 전망이다. 세계적 시장조사기관인 포레스터리서치는 2003년이면 세계 기업간 전자상거래(B2B EC) 규모가 3조2천억 달러(약 4천조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또 같은 시기 미국의 B2B EC시장은 1조3천억 달러, 기업대 소비자간(B2C) 시장은 1천1백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측했다.

차세대 인터넷은 일상생활에도 다시 변화의 바람을 몰고올 것으로 보인다. 영상·음성·문자 등을 디지털 신호로 바꿔 네트워크에서 보다 빠른 속도와 뛰어난 품질로 재현하는 차세대 인터넷은 가정을 홈네트워크로 다시 짤 전망이다. 이 네트워크는 PC에서부터 디지털 TV·카메라·냉장고를 비롯, 모든 가전제품을 유무선으로 연결시킨다.

이렇게 되면 집밖에서 인터넷으로 냉난방 기기를 작동시키거나 비디오를 켤 수 있게 된다. TV 한 대로 쌍방향 멀티통신을 할 수 있는 것도 물론이다. 데이터 송수신과 원격제어가 가능한 차세대 가전제품인 ‘인터넷 정보가전’은 홈서버를 통해 차세대 인터넷과 연결된다.

또 동영상·음성·데이터 등의 서비스 품질이 크게 개선돼 원격 교육·진료·회의 등이 더욱 활성화될 전망이다. 여기에 차세대 인터넷에선 3차원 표현이 가능, 사이버 쇼핑이나 사이버 상점이 더욱 인기를 끌 것으로 보인다. 안방에 누워 일하고 노는 시대가 곧 올지도 모른다. 심지어 정치·행정 분야도 디지털 민주주의와 전자투표 등이 실현될 수 있다.

국내에서 인터넷은 지난 82년 서울대와 전자통신연구원의 전신인 KIET를 연결하는 1천2백bps급의 ‘SDN’이 기원이다. 그 뒤 94년 인터넷서비스 제공업체(ISP)들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인터넷 시대가 열렸고 98년 말 3백10만여 명이던 인터넷 사용자 수는 2002년 2천만 명이 넘을 전망이다.

정부는 차세대 인터넷, 광통신을 비롯해 21세기 한국경제를 이끌어갈 정보통신 분야 6대 사업을 정하고 2004년까지 4조1천4백42억원을 들여 키우기로 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차세대 인터넷이 정보통신 서비스의 중심이 되기까지 겪어야 할 시행착오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월드와이드웹 물결이 세상을 바꿔 가면서 통신사업의 숱한 성공과 좌절, 초고속 통신망사업 등 정보화 기반 구축에서 역정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 또 거의 외국산이 독점하고 있는 초고속 인터넷 시스템과 접속모뎀 기술을 국산화하고 차세대 인터넷 시대에 걸맞은 콘텐츠 산업에 대한 투자도 더불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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