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냉키 고백 … 미 경제 2년 내 회복 어렵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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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버냉키 의장. [블룸버그]


벤 버냉키(58)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별명은 ‘헬리콥터 벤’이었다. 대공황 전문가인 그가 ‘위기 순간 헬리콥터로 돈을 뿌리듯 유동성을 늘리면 된다’고 말해 2006년 취임 순간부터 그렇게 불렸다.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엔 그에게 별호가 하나 더 붙었다. ‘창의적인 벤(Creative Ben)’이다. 전임자 앨런 그린스펀(85)도 상상하기 힘든 아주 새로운 정책을 개발해서였다. 그는 다급한 순간 초우량 회사채뿐 아니라 모기지 관련 증권이나 기업어음까지 사들이는 방식으로 시장에 돈을 주입했다. 그는 투자은행마저도 시중은행으로 면허를 바꿔 긴급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런 버냉키가 10일 (한국시간) 창의력을 또 한번 발휘했다. 이른바 ‘금리 동결기간 예고제’를 만들었다. 그는 이날 “이례적으로 낮은 현재 기준금리(0~0.25%)를 최소한 2013년 중반까지는 유지해도 되는 경제 상황”이라고 밝혔다. 금리를 2년간 동결하겠다는 얘기다. 뒤집어 보면 사실상 앞으로 2년간 미국 경제는 희망이 없다고 고백한 꼴이다.

 역사적으로 아주 이례적인 기술이다. 로버트 헤첼 리치먼드 연방준비은행의 이코노미스트는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알기론 근대 중앙은행 310여 년 역사에서 금리 동결 기간을 미리 예고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좀 더 짧게 보면 그린스펀 패러다임의 폐기나 다름없다. 그는 시장의 의표를 찌르듯이 기준금리를 올리고 내렸다. 심리적 충격 요법으로 시장을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그의 기준금리 조정이 경기나 고용 동향보다 한 걸음 앞서 ‘선제적 정책’으로 불리기도 했다.

 버냉키가 예고제 실험이란 강수를 둔 이면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우선 전 지구적인 자산가격 대폭락이다. 미 국가부도 우려가 본격화한 지난달 26일에서 이달 8일 블랙먼데이까지 글로벌 주식가치는 7조8000억 달러(약 8500조원) 증발했다. 이 증발을 막지 못하면 미국뿐 아니라 선진국 소비가 급감할 수 있다. 미 실물경제도 심상찮았다. 버냉키도 “경제성장률이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예상한 것보다 상당히 낮다”고 진단했다. 올 6월 그는 “완만하지만 꾸준히 회복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런 진단 변화는 시장을 괴롭힌 더블딥 우려가 근거 없지는 않았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사정이 급하다고 버냉키가 모든 카드를 다 보여줄 순 없었다. 시장이 내심 기대한 양적 완화(QE)는 넌지시 내비치기만 했다. 그는 이른바 오퍼레이션 트위스트(Operation Twist), 단기 국채를 팔고 장기 국채를 사들이는 작전도 쓸 수 있었다. 단기 금리를 올려 자본을 유인하고 장기 금리를 떨어뜨려 기업의 투자를 자극하는 기법이다. 그러나 결국 버냉키는 이런 카드들을 모두 포기하고 예고제라는 듣도 보도 못한 처방을 내놓았다.

이에 따라 미 기준금리는 2008년 12월 이후 4년 넘게 0.25%로 고정되는 셈이다. 1980년 이후 기준금리 인하 뒤 동결 기간은 12~18개월 정도였다. 버냉키의 동결 기간이 서너 배 길다. 그동안 시장 플레이어들은 중대한 리스크 하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기준금리 변동 리스크다.

 그 리스크는 월가 플레이어에겐 94년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그해 초 그린스펀이 전격적으로 기준금리를 올리는 바람에 저금리 기조가 유지될 것으로 보고 베팅한 플레이어들이 호되게 당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미 부호들의 마을인 오렌지카운티의 파산이었다. 이 작은 도시의 재무책임자는 파생상품을 활용해 저금리에 베팅했다가 그린스펀의 의표 찌르기에 당했다.

 그러나 실물경제 측면에서 보면 버냉키 예고제는 달리 해석될 수 있다. “미 경제가 2013년 중반까지는 확장 국면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고 애셔 뱅걸로 미 노던트러스트 이코노미스트는 이날 말했다. 미 경제가 앞으로 2년 정도는 지지부진할 수 있다는 얘기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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