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서방통신'블레어의 푸틴 탐색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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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에 항상 같이 있었다. "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대행이 11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를 만나 한 말이다.

정상들끼리의 만남에서 흔히 오가는 덕담(德談) 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에는 영국과 러시아의 독특한 역사가 함축돼 있어 러 정치언어학자들로부터 절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리적인 계산과 유럽대륙의 변화에 민감했던 영국은 대소(對蘇) 문제에서 늘 다른 나라들을 앞질렀다.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이 발발해 니콜라이 2세 일가를 볼셰비키들이 총살하자 이에 격렬히 항의하며 국제제재를 주도했던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의 왕실은 러시아의 황실과도 먼 친척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볼셰비키가 러시아를 확고하게 장악해가자 제일 먼저 대세를 인정하고 공산 소련과 수교한 것도 영국이었다.

냉전시절 영화 007시리즈로 소련에 대항하는 자유세계의 전설적인 첩보원의 대명사가 된 제임스 본드는 영국 대외첩보부 MI5 요원이고 소련을 배경으로 가장 사실적인 첩보소설을 써낸 작가 프레드릭 포사이드도 영국인이다. 철(鐵) 의 장막이란 말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만들었다.

이와 함께 "대화가 가능한 인물" 이라며 고르바초프를 국제정치사회에 등장시킨 것도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였다.

영국과 러시아의 인연은 이처럼 현실과 가상의 공간을 넘나들며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 때문에 미국은 대소 정책에선 영국의 조언과 협조를 구하고 어떤 경우엔 정보원까지 공유하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점에서 11일까지 이틀간 러시아의 고도(古都)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이뤄진 푸틴과 블레어의 대면은 주목을 끌었다. 블레어는 서방의 지도자들을 대표해 러시아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한 푸틴을 평가해야 하는 책무가 있었던 것 같다.

지난 몇 년간 G8 정상회담에서의 옐친은 비교적 호락호락했다. 그런데 올해 열릴 G8 정상회담엔 KGB 출신의 푸틴이 참석하게 된다. 따라서 블레어는 이번에 서방을 대표해 탐색전을 벌인 셈이다.

블레어의 평가가 무엇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푸틴을 한마디로 소개하는 대처류의 명언은 만들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회담기간 내내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블레어는 "영국 기업들의 대러 투자를 독려하겠다" 고도 말했다.

결국 블레어는 푸틴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할 수 있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면서도 푸틴과 푸틴이 이끌 러시아의 진로에 대해선 아직 판단을 유보한 것은 아닐까. 블레어가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 등 서방의 지도자들에게 푸틴을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하다.

김석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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