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악어 입 앞에서 뚝심으로 버텨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어제 중앙일보 경제면에 실린 ‘악어 입 그래프’가 화제다. 일본 재무성의 마나고 야스시(眞砂靖) 주계국장(우리의 예산실장 격)이 한국 공무원들에게 “제발 일본의 전철을 밟지 말라”며 보여준 그래프라고 한다. 세수(稅收)는 줄어드는데 재정 투자만 확대하다 보니 일본 재정 추이 그래프가 마치 악어 입처럼 쩍 벌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은 국가 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두 배가 넘어 국가 신용등급이 강등당하는 수모를 겪고 있다. 이는 유로존의 시한폭탄인 그리스의 국가 부채 비율(150%)을 훨씬 웃도는 수준이다.

 일본은 제로 금리 때문에 더 이상 금리를 낮출 수 없고, 무역흑자로 인해 엔 환율도 끌어올리기 어렵다. 유일하게 남은 재정 정책마저 악어 그래프에 발목이 잡혀 꼼짝할 수 없는 신세다. 마나고 주계국장은 “돌아보면 1973년의 ‘복지 원년’ 때부터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게 패착”이라며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 때는 이미 늦었다”고 한국에 충고했다. 한국이라도 저출산·고령화에 대비해 선제 대응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한국에도 어느새 ‘균형예산’이란 표현이 사라졌다. 대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평균과 비교하면 여전히 정부 부채 비율이 낮다”는 주장만 득세하고 있다. 하지만 나랏빚의 무서움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미 한국은 일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저출산·고령화가 진행되고 정치권에는 포퓰리즘 바람이 거세다. 하루빨리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치지 않으면 끔찍한 악어 입 속에 갇히는 것은 시간문제다.

 돌아보면 일본 정치권은 비겁했다. 세수를 늘리기 위해 소비세(한국의 부가가치세)를 올릴 때마다 정권이 무너졌다. 그것이 두려워 일본 정치권은 증세(增稅)를 외면했다. 대신 나랏돈을 푸는 데는 누구보다 빨랐다. 복지를 늘린다고, 경기부양을 한다고 수백조원씩 예사로 풀었다. 요즘 우리 주변에도 똑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공짜 점심과 반값 등록금 같은 선심성 공약들이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다. 미래를 내다보며 나라를 앞장서 이끌어 가야 할 정치 지도자들은 달콤한 포퓰리즘으로 대중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기에 바쁘다.

 그나마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이 “포크 배럴(pork barrel·돼지고기 통)에 맞서 재정 건전성을 복원하고 재정 규율을 확립하겠다”고 다짐한 것은 다행스럽다. 돼지고기 통을 던져주면 덤벼드는 노예처럼 포퓰리즘에 빠진 우리 정치권을 적절하게 비유하는 표현은 없다. 박 장관의 발언을 비난하는 정치인들은 스스로를 먼저 돌아봐야 할 것이다. 2조원이면 된다고 장담하던 세종시와 4대 강 사업에 실제로 10배 이상의 돈이 들어가지 않았는가. 그나마 지금 미래를 내다보며 이성을 갖춘 쪽은 박 장관과 공무원들이다. 나라 전체가 악어 입에 집어삼켜지기 전에 단단히 마음먹어야 한다. 악어 그래프를 정부 청사 앞에 큼지막하게 걸어놓고 정치권의 포퓰리즘 광풍에 용감하게 맞서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용기와 뚝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