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위기, 이제 시작일 뿐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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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호 02면

저승의 법정에 판사가 들어섰다. 최고참인 칭기즈칸이 ‘차렷’ 구령을 외쳤다. 모두 일어나서 줄을 맞추었지만 무솔리니만 꿈쩍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다시 ‘차렷’ 하고 외쳐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동향인 마키아벨리가 나섰다. ‘어이, 카메라맨 불러’. 그러자 무솔리니가 벌떡 일어나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고 한다. 정치인은 카메라 앞에선 깜박 죽는다는 우화다.

김영욱의 경제세상

다시 카메라의 계절이 돌아왔다. 내년 총선과 대선 말이다. 재계의 수난 계절 역시 돌아왔다. 선거 때는 ‘반(反)재계’가 최고의 카메라다. 재계를 족치고 재벌을 옥죄면 득표에 도움 된다고 생각하는 정치권 때문이다. 여(與)건 야(野)건, 보수건 진보건 다 똑같다. 선거가 닥치면 재계는 동네북 신세다. 재계의 수난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며칠 전 국회가 전경련 허창수 회장을 청문회 증인으로 불렀다. 증인으로 부른 대기업 총수가 불참 통보를 하자 아예 청문회 일정을 연기했다. 그러니 뒷말이 무성할 수밖에. 전경련 회장이 정치권을 향해 포퓰리즘이라고 공박한 데 대한 보복이란다. 하긴 그런 면도 있다. 하지만 근본 이유는 딴 데 있다. 전경련 회장이 그런 발언을 하지 않았더라도, 노사분규라는 현안이 없었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이다. 온갖 이유를 대서라도 총수를 불러내 호통치고, 면박 줬을 게다. 그런 현장이 카메라에 잡히면 선거에 호재라서다. 그러니 이게 끝일 리 없다. 다른 총수들도 줄줄이 불려갈 것이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지고, 경제가 나빠지면 재벌은 희생양이 된다. 과거 정부도 그랬다. 독재정권 때는 국제그룹이 공중분해됐고, YS 때는 재벌 총수들이 줄줄이 법정에 섰다. DJ 시절엔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몰렸고 노무현 정부 때도 총수들이 여럿 구속됐다. 이번 정부라고 다를 리 없다. 아예 재벌시스템을 흔든다. 재벌의 특징은 두 가지다. 오너가 직접 경영하고, 수많은 계열사를 거느린다. 그런 수단 중 하나가 계열사에 일감 주기다. 자녀가 계열사를 설립하면 그 회사에 다른 계열사들이 일감을 준다. 이런 식으로 자녀 재산이 불어나면 그 돈으로 경영권을 승계한다. 이걸 정부가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아예 상법을 바꿔 일감 주는 걸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재벌시스템에는 엄청난 위기일 수밖에.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도 마찬가지다. 공적 연금으론 전 세계에서 가장 덩치가 큰 축에 속하는 국민연금이 본격적으로 나서면 오너의 경영권이 흔들리게 돼 있다.

재계의 위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갈수록 더 심해진다. 당장 내년 선거 때는 복지 확대가 최대 이슈다. 한나라당이 반값 등록금에 그토록 목매는 이유다. 보수 진영 학자들마저 양극화, 비정규직, 복지를 화두로 들고 나올 정도다. 박근혜 전 대표의 측근인 유승민 의원이 무상급식과 무상보육에 찬성하는 판이다. 이런 터에 손학규 민주당 대표,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야 더 말해서 뭣하랴. 이유는 간단하다. 표를 얻기 위해서다. 역설적으로 양극화가 그만큼 심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부자와 가난한 자,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수도권과 지방의 양극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별다른 고민 없이 손쉽게 표를 얻는 방법은 재벌과 대기업, 가진 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거다. 아무리 나라 경제가 거덜난다고 해도, 반(反)재벌은 자해행위라고 해도, 정치권이 귀담아듣지 않는 까닭이다. 이 정부보다 다음 정부에서 반(反)재벌이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다. 정치권이 바뀔 리 없다면 재계가 변하는 수밖에 없다. 그 방향은 국민의 마음이다. 국민으로부터 사랑받아야만 재계도 살아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악순환을 끊는 고리는 삼성이 이미 6년 전에 제시했다. ‘삼성공화국론’에 한창 시달리던 삼성은 사장단회의를 열어 다짐했다. “1%의 반대세력도 포용하겠다. 진정한 국민기업이 되겠다”고 말이다. 사회공헌활동도 더 많이 하고, 중소기업 지원도 강화하겠다고 했다. 상생경영, 나눔경영이란 말도 썼다. 그게 정답이다. 막가파의 포퓰리즘 정치판을 바꾸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 안타깝지만 그게 우리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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