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힐 부대’ 추억에 불 질렀더니…영화 ‘써니’ 본 사람 벌써 500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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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영화 ‘써니’는 ‘주인공이 너무 많아 이야기가 산만해질 수 있다’는 단점을 관객 공감대를 넓히는 강점으로 바꿨다.


결론은 ‘역발상’이다. 소위 ‘미투(me too)’ 전략은 안 된다. 남의 치킨집이 잘됐다고 내 치킨집도 잘되란 법은 없다. 최근 전국 관객 522만 명을 넘어선 영화 ‘써니’를 봐도 그렇다.

 ‘써니’는 흥행 공식상으론 ‘장사 안 될’ 요소가 다분했다. 아역과 성인 합쳐 주인공이 무려 14명. 톱스타는 한 명도 없었다. 유괴나 살인, 시체유기 등 자극적인 소재도 아니다. 40대 아줌마들이 여고시절이었던 1980년대를 돌아보는, 어찌 보면 단순한 얘기다. 하지만 ‘쿵푸팬더2’‘캐리비안의 해적4: 낯선 조류’ 등 할리우드 대작 사이에서 흥행을 일궜다. 개봉 40여일 만에 예매율 1위를 한다는 건 ‘괴력’에 가깝다.

 ‘써니’는 830만 관객을 동원한 ‘과속스캔들’(2008) 강형철 감독의 두 번째 영화다. ‘과속스캔들’도 뜻밖의 ‘대박’이었다. 돈·스타·폭력 등 소위 ‘대작 코드’ 없이도 흥행이 된다는 사실을 입증하며 충무로 기획영화의 지평을 넓혔다. 강 감독과 함께 ‘과속스캔들’‘써니’를 흥행시킨 토일렛픽쳐스 이안나(32) 프로듀서로부터 ‘써니’의 흥행 요인을 들어봤다.

영화 ‘써니’의 이안나 프로듀서. [안성식 기자]

 ◆“여자영화 나올 때 됐다”=‘써니’의 아이디어가 나온 건 2009년. 충무로에선 한 해 전 ‘추격자’의 성공으로 스릴러 붐이 거셀 때였다. ‘써니’ 제작진의 생각은 좀 달랐다. “남자배우 둘을 내세운 ‘투 톱 영화’가 무더기로 만들어질 때였죠. ‘여배우들이 죄다 놀고 있다’는 소문이 매일같이 들려왔어요. 여자들이 볼 영화가 없구나, 이젠 여자가 주인공으로 나와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죠.”

 충무로가 ‘남자영화’를 선호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극장 주 고객이 20대 초반 여성이어서다. “멋진 남자배우가 나오면 상대방이 나인 것처럼 동일시하니까 그렇겠죠. 하지만 좀더 몰입도가 높은 건 주인공이 나 같을 때 아닐까요. 꽃미남 배우의 상대가 나라고 생각하는 건 판타지이지만, 저 주인공이 나라고 여기는 건 훨씬 더 현실감이 있잖아요. ‘써니’는 그런 면에서 여성관객들의 감정이입 폭이 훨씬 깊고 넓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예상보다 관객층은 더 넓었다. 주요 예매사이트 예매율을 보면 20대, 30대, 40대 관객의 비율이 각각 30%대로 고른 편이다. 문화상품을 주체적으로 소비하는 30∼40대 여성 직장인을 일컫는 ‘하이힐 부대’의 지지를 얻었다. 개봉 7주째에 접어들어서 예매율 1위를 기록한 게 단적인 예다. 다음 달 초 강 감독이 재편집한 감독판 개봉을 앞두고 있어 600만 관객 돌파도 어렵지 않을 전망이다.

 ◆사건보다 사연, 스토리보다 캐릭터=전찬일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써니’에 대해 “특정한 사건이 없는데도 등장인물 나름대로의 사연에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대단하다”고 평했다. ‘7공주’ 캐릭터의 개성이 제각기 뚜렷한 덕이다. 애초 시나리오를 모니터했던 투자사들은 하나같이 “주인공 7명은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7명이 나오니까 나 같은 사람도 있고 내가 옛날에 봤던 것 같은 사람도 있는 거에요. 사람마다 사연이 다양하니 공감대가 그만큼 넓어졌죠. 누구나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춘화(강소라)처럼 시원시원하고 멋진 ‘학교짱’도 있었고, 수지(민효린)처럼 잡지모델할 만큼 예쁜 애도 있었잖아요. 15년이 흘러 그들은 다양하게 변하죠. 나미(유호정)처럼 가정주부가 되기도 하고, 춘화처럼 병에 걸리기도 하고.”

 ‘써니’ 캐스팅 제1원칙은 “캐릭터에 절대적으로 맞는 배우를 고른다”는 것이었다. “1963년생부터 1970년생 여배우 목록을 만들었어요. 역할별로 10배수, 5배수, 3배수로 압축하는 과정을 거쳤죠. 유호정-심은경처럼 성인과 아역의 이미지가 정말 똑같다 싶을 정도로 비슷하지 않으면 안 됐죠. 다행히 14명 전원이 저희가 1순위로 생각했던 배우들이었어요. 왜 전도연·이영애 같은 톱스타를 안 쓰느냐는 얘기를 참 많이 들었어요. 애초부터 ‘관객 500만 명을 넘겨야겠다’고 의도했다면 톱스타도 쓰고 아역에 걸그룹 멤버도 캐스팅했겠죠. 상업영화는 비즈니스지만 동시에 문화상품이잖아요. ‘제2의 과속스캔들’, ‘제2의 ○○○’를 자꾸 만들어내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새로운 걸 자꾸 보여줘야 관객이 반응하고 시장이 넓어지는 게 아닐까요.”

글=기선민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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