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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금융가엔 먹구름 몰려오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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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경민
뉴욕 특파원

요즘 국제금융시장의 기류가 심상치 않다. 돈 냄새라면 귀신인 헤지펀드가 신흥시장과 상품시장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국제유가와 금·은·동 값이 곤두박질한 건 이 때문이다. 대신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미국 국채 가격은 반등했다. 바야흐로 국제금융시장에 다시 한번 폭풍우가 몰려올 조짐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후 미국은 국제금융시장의 돈 흐름을 바꿔놓았다. 미 연방준비제도(Fed)는 앞장서서 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낮췄다. 미국 정부와 Fed는 2조5000억 달러에 달하는 돈을 시장에 풀었다. 고삐 풀린 달러는 미국에만 머물지 않았다. 제로 금리 때문이었다. 대신 신흥시장과 상품시장으로 몰려가 투기 광풍(狂風)을 일으켰다.

 한데 이 흐름에 변화가 생겼다. Fed는 이달 말로 6000억 달러를 푸는 ‘2차 양적 완화 조치’를 끝낼 예정이다. 달러를 방출해온 수문을 닫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머지않아 달러 물길은 신흥시장에서 미국, 정확히는 Fed로 역류할 수밖에 없다. 어쩐지 2008년의 데자뷰를 보는 것 같다. 당시에도 금융위기 진원지는 미국이었다. 그런데도 달러는 신흥시장에서 썰물처럼 빠져 달러 기근을 초래했다.

 미국 경제가 살아나지 않는 한 장기적으로 달러는 약세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돈 흐름이 바뀌는 와중엔 상황이 달라진다. 단기외채가 많고 재정이 부실한 국가는 투기자본의 먹잇감이 된다. 그리스를 비롯한 남유럽의 재정 부실 국가가 코피 터지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한국도 미국이 내민 ‘통화 스와프’라는 동아줄 덕에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을 뿐이다.

 먹구름은 잔뜩 끼고 있는데 요즘 국내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단기외채는 어느새 2008년 수준을 넘어 사상 최고치로 불었다. 너도나도 달러 약세에 투기했다는 얘기다. 심지어 원화가 급한 국내기업조차 단기 달러 차입에 나서고 있다. 이러다 어느 순간 달러 물길이 바뀌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내년 총선거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벌써 ‘공짜 바람’이 거센 것도 불길하다. 무상 급식에서 시작한 공짜 시리즈가 무상 급식·보육·의료라는 ‘무상 3종 세트’로 진화한 게 엊그제다. 그런데 반값 등록금 시위 현장에선 ‘대학교육 의무화’ 주장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1000만원 등록금’에 좌절한 대학생의 심정은 예비 대학생을 둔 학부모로서 충분히 공감한다. 그렇지만 딱한 게 어디 대학생뿐이랴. 세계 최저 출산율은 어떻고, 점심 굶는 초등학생부터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100만 빈곤 노인가구는 어쩔 것인가.

 유럽에 한류 바람이 분다고 한국이 당장 유럽 복지국가를 쫓아갈 수 있다고 믿는 건 착각이다. 재정위기로 몸살을 앓고 있는 유럽의 ‘PIIGS(포르투갈·이탈리아·아일랜드·그리스·스페인의 이니셜)’ 국가 가운데 신용등급이 한국보다 낮은 나라는 그리스 하나뿐이라는 게 불편하지만 냉엄한 국제금융가의 현실이다.

정경민 뉴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