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범의 세상사 편력] 사복을 채우려고 공복을 자처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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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송나라에 송씨 형제가 살았습니다. 형 송교와 동생 송기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한꺼번에 과거에 급제해 세상에 이름을 날렸지요. 그런데 이후 두 사람의 태도는 뚜렷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송교는 재상이 되고서도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청렴하게 살았습니다. 반면 한림학사였던 송기는 허구한 날 기생을 옆에 끼고 음주가무로 세월 가는 줄 몰랐습니다.

 형은 동생이 걱정되었겠지요. 어느 정월 대보름날 재상 형은 사람을 시켜 말을 전하게 했습니다. “옛날 어느 해 정월 대보름날 우리 둘이서 부추전을 부쳐 먹던 일이 생각나지 않는가?” 올챙이 적 시절을 잊지 말고, 초심을 간직하라는 당부였지요. 하지만 학사 동생은 이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고는 말했습니다. “부디 재상께 전해주시게. 그때 그곳에서 부추전을 부쳐 먹은 게 무엇 때문인지 모르시냐고.”

 같은 핏줄, 같은 처지, 같은 시기에 벼슬을 해도 사람 마음가짐에 따라 이토록 큰 차이가 나는 겁니다. 세상을 잘살게 하기 위해 벼슬을 하는 사람과, 자기가 잘살기 위해 벼슬을 하는 사람의 행동이 같을 순 없겠죠. 오랜 세월이 흐르고 무대를 이 땅으로 옮겨도 달라지지 않는 이치입니다.

 정녕 세상에는 재상 형 같은 공직자가 더 많을 텁니다. 하지만 물을 흐리는 데는 미꾸라지 몇 마리면 충분하지요. 학사 동생처럼 사복(私腹)을 채우기 위해 공복(公僕) 되기를 자처한 사이비 공인들 말입니다.

 금융감독원, 감사원처럼 부정과 비리를 감시해야 할 기관에 생선 냄새를 맡은 고양이들이 현관을 지킵니다. 다수 국민을 위한 정책을 펴야 할 정부 부처에는 이익단체라는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는 강아지가 있습니다.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와 지방의회에도 어물전을 망신시키겠다고 작심한 꼴뚜기들이 고개를 듭니다. 이들은 노는 물은 달라도 하는 짓은 한가집니다. 국민이 국민을 위해 쓰라고 맡겨놓은 권력을 제 것인 양, 제 잘난 듯, 저만 위해 사용한다는 거지요.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가진 권력을 다해 공리민복 아닌 사리사욕을 만족시킨다는 겁니다.

 이들이 제일 싫어할 공직자의 자세를 설파한 정약용 선생은 그래서 이렇게 개탄했습니다. “목자가 백성을 위해 있는가, 백성이 목자를 위해 있는가. 백성은 곡식과 피륙을 제공해 목자를 섬기고, 가마와 쌀을 제공해 목자를 송영한다. 결국 백성은 피와 살과 정신까지 바쳐 목자를 살찌게 하는 것이니, 이로 보자면 백성이 목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닌가.”

 송 학사 같은 부류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깁니다. 특혜와 특권이 없다면 뭐 하러 고생해서 벼슬하고 출세하느냔 말이지요. 국민이 안중에 있을 리 없지요. 뵈는 게 없으니 거리낄 것도 없습니다. 특권의식이 100% 부패와 비리로 이어지는 이유입니다.

 주목할 것은 송 학사 부류들이 특정한 시기나 시대에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어디서나 늘 존재합니다. 과거에 그랬듯, 현재는 물론이며 미래에도 존재할 거란 말입니다. 중국 작가 임어당이 소설 『북경호일(北京好日)』에서 한 말이 그겁니다. “관리가 모두 탐욕스러우면 탐욕이란 말을 쓸 필요가 없다. 관리가 모두 오탁(汚濁)하면 오탁이란 말을 쓸 필요가 없다. 어떤 훌륭한 정치 밑에서도 청렴한 관리도 있고 부패한 관리도 있다.”

 이 말을 주목하란 건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송 학사 부류가 언제 어디서건 존재한다는 것은, 달리 말해 누구나 송 학사 부류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까닭입니다. 송 학사 역시 부추전을 먹을 때는 형과 생각이 다르지 않았을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권력의 단맛이 부추전 맛을 잊게 만든 거지요.

 하지만 권력의 칼자루는 날카롭습니다. 함부로 휘두르다가는 내 손도 다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칼이 길면 길수록, 즉 권력이 크면 클수록 내가 입을 수 있는 상처도 커집니다. 특히나 사적인 이익을 위해 쓰는 권력은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그 칼 끝이 나를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작고한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의 좌우명,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도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겁니다. 역사를 두려워한다면 권력의 칼을 함부로 휘두를 수 없겠지요. 역사란 백성의 눈입니다. 감은 듯 보이지만 속까지 꿰뚫어보는 눈입니다. 절대 그 눈을 속일 수 있다고 믿지 마십시오. 착각의 대가는 너무도 큽니다. 때론 목숨과 맞바꿔야 하는 경우마저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름에 묻은 얼룩이 지워질까요.

이훈범 중앙일보 j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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