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로펌들, '벤처 엑소더스' 몸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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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실리콘 밸리에서는 非 인터넷 기업에서 인터넷 기업으로의 ''두뇌유출''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인재유출이 가장 심각한 분야는 인터넷 벤처들의 법률, 경영자문을 맡고 있는 로펌, 컨설팅회사, 투자은행 등 업무상 벤처기업 경영자들과 접촉이 많은 고급 두뇌 집단들. 그 중에서도 로펌 소속 변호사들의 이직이 가장 심하다.

윌슨 손시니, 퍼킨스 로위, 벤처 로 그룹, 쿨리 가다드 등 실리콘 밸리에서 손꼽히는 톱 클래스급 법률자문회사에는 하버드·스탠퍼드·예일·버클리 등 명문 로스쿨 출신의 기업전문 변호사들이 활약중이다.

이들은 고객인 인터넷 기업에 계약 등과 관련한 법률 자문을 해 주는 일 외에도 경영인과 벤처 캐피털리스트를 연결시켜 주는 등 비즈니스의 핵심적인 자문역을 담당하는 일이 많다.

이들의 역할이 커지자 인터넷 기업들은 아예 거액의 연봉을 제시하며 기획담당 부사장 등 고위 경영층 자리로 이들을 스카우트하는 일이 늘고 있다. 점점 많은 수의 변호사들은 이러한 제안을 받아들여 안정적이고 대접받는 로펌 소속 변호사 자리를 떠나고 있다.

왜 이처럼 벤처기업으로의 ''인재 엑소더스''가 일어나는 걸까? 필자가 퍼킨스 코위(야후와 아마존의 법률자문을 맡고 있는 로펌)사에서 일한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 배경에는 몇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있다.

우선, 인터넷 기업 분야의 변호사들은 상담중 만난 기업가들이 단기간에 축적한 엄청난 부를 옆에서 지켜 보면서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고 있다. 필자가 다니던 로펌의 한 클라이언트는 세계적인 인터넷 회사인 라이코스에 자그마치 9천만 달러(한화 1천8억원)를 받고 자신의 회사를 넘겼는데 사장의 나이가 고작 20살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40대의 고참 변호사는 "나보다 별로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 이 애숭이 사장들은 내 연봉의 백배, 천배가 넘는 돈을 벌고, 게다가 같은 시간 일해도 즐기면서 하고 있다. 난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며 씁쓸해 했다.

실리콘 밸리 변호사들의 이직률이 높은 또다른 이유로는 젊은 변호사들의 인내심 부족을 들 수 있다. 로펌에 입사해 파트너의 지위까지 올라가는데는 통상 7~8년이 걸리지만 이 긴 기간 외부에서 고액 연봉으로 손짓하는 많은 유혹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

평생을 로펌에서 썩히기보다는 3~4년 경력을 쌓은 후 기업의 경영층으로 스카우트돼 가는 것이 하나의 공식처럼 자리잡고 있다. 자리를 박차고 떠난 이들이 만약 인터넷 기업이 망해 다시 로펌으로 돌아가려 해도 노련한 변호사가 태부족인 로펌들로서는 대환영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로펌들마다 ''인재 잡아 두기''를 위한 아이디어가 백출하고 있다. 그간 로펌들에게 있어 왔던 격식차린 딱딱한 조직문화의 개선 노력들도 하나 둘 등장하고 있다.

퍼킨스 코위사의 경우는 사무실 한쪽에 당구대를 설치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을 주기도 하고, 정장 차림의 의복문화를 탈피, 청바지까지 허용되는 자유로운 캐주얼 차림으로 근무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보수면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실리콘 밸리내의 로펌들은 ''금전적 보상''을 위해 담당 변호사가 고객사에게서 보수를 주식으로 받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실리콘 밸리 외의 다른 지역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변호사 윤리와 관련해 미국내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주식을 통한 차익을 노려 고객사에게 고의적인 합병을 유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 실리콘 밸리의 로펌들은 통상 1~2%의 지분을 법률자문의 보수로 받고 있는데, 최근 들어서는 5%까지 요구하는 일도 늘고 있다. 이는 인터넷 관련법이 아직까지 허술해 생긴 일로 법원과 미 변호사 협회가 하루 속히 나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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