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5000원권 율곡은 서양인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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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영국에서 들여온 지폐 원판으로 찍어 서양인 초상 느낌이 나는 5000원권 ‘율곡’.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돌고 도는 돈. 그런데 돈을 보면 우리 역사가 보인다.

 1957년 발행된 500환권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초상이 지폐 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돈이 접힐 때 얼굴도 접히니 불경하다 하여 59년 신500환권에선 초상을 우측으로 옮겨놓는다. 5000원 권에는 율곡(栗谷) 이이 초상이 있다. 그런데 한 때는 율곡이 서양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77년 이전에는 영국 토마스 데레루사에서 만든 지폐 원판을 들여왔기 때문이다. ‘서양율곡’이란 별칭이 붙었던 이 5000원 권은 77년 우리 얼굴을 한 신권이 발행되면서 80년 12월 발행이 중지된다.

 화폐는 우리 문화사의 축소판이다.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천진기)은 ‘정성채 박사 기증 화폐 특별전-비록 돈이라 할지라도 아름답지 아니한가’를 18일부터 7월 11일까지 연다. 총 1873건, 4973점의 유물이 나온다.

 우리나라 최초의 주화인 고려 건원중보(乾元重寶)’부터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등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주요 화폐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다. 우리나라 성형외과 분야의 선구자인 정성채(89) 박사가 평생 수집한 화폐를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한 덕분이다. 정 박사는 해외 출장 중 외국 화폐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우리 화폐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고종(高宗) 연간 경성전화국에 초빙된 독일인 기술자 크라우스가 만든 일량주석시주화(一兩朱錫試鑄貨)는 수집가가 가장 아끼는 것 중 하나다. 일명 ‘을유시주화’다. 금·은·동화 각각 5종씩 총 30세트가 시험 제조됐다고 한다. 발행 20여 일 뒤 화폐개혁이 단행돼 최단 기간 유통 기록을 남긴 ‘개갑100환권’, 정주영 전 현대그룹회장이 우리나라 선박기술을 보여주기 위해 샘플로 들고 갔다고 전하는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권 지폐 등도 나온다. 실물경제를 위해 유통된 화폐가 아니라 기원을 담은 ‘별전(別錢)’도 200여 점 전시된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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