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이슬람교도’ 홍콩 가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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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정용환
홍콩특파원

홍콩의 대표적 중상층 거주 지역인 해피 밸리(Happy Valley). 시내의 상업 중심지와 떨어져 있고 산 중턱에 위치해 쾌적하고 조용한 곳이다. 생활 편의 시설이 거의 없어 분유 한 통을 사려 해도 미니 버스를 타고 내려와야 한다. 이런 잔심부름은 보통 필리핀·인도네시아에서 온 외국인 가정부 몫이다. 이곳에 사는 홍콩인 지인 웡(黃)씨 부부는 요즘 3년째 같이 생활하고 있는 필리핀 가정부 때문에 냉가슴을 앓고 있다. 인구의 90% 가까이 가톨릭 신자인 필리핀 가정부가 최근 이슬람교로 개종을 했다고 한다. 귓등으로 흘려 듣고 말았다는데 개종의 현실적 의미는 즉각 피부로 와닿았다. 외출을 하려면 기도를 해야 하고 히잡을 두르기 위해 30분씩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 일이 다반사가 됐다고 한다. 위약금을 물고 계약을 해지하면 될 것 아니냐고 물었다. “새 사람을 들인다 해도 문화와 풍습이 다른 나라 사람과 익숙해지는 게 만만치 않은 일이고 이슬람교로 개종했다고 나오면 낭패 아니냐”며 난감해 했다. 웡은 이런 사정을 겪고 있는 주변의 홍콩 가정이 한둘이 아니라고 했다.

 외국인 가정부는 홍콩 최저 임금선의 반값 수준인 월 3580 홍콩달러(약 50만원)을 받는다. 이쯤 되면 살인적인 물가로 악명 높은 홍콩에서 바닥 임금을 받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종교를 빌려 일종의 준법 투쟁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지금은 열악한 처우 개선과 임금 인상 요구를 위해 조직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지만 개종 같이 작은 꾀로 시작된 잔물결이 저임금 노동력을 한껏 즐겼던 홍콩 사회에 어떤 파고를 몰고 올지 자못 궁금하다.

 부동산·물가 폭등은 홍콩의 서민층도 각성시키고 있다. 카우룽(九龍)의 메이푸(美孚)신촌 주민들은 지난주 노른자위 땅인 훙홈(紅磡)의 주택부지 경매장을 급습해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장식했다. 주민들은 사고 위험 때문에 유류 저장시설이 옮겨간 자리에 고급 아파트가 들어서기로 결정 나자 ‘집 앞에 병풍 치느냐’며 부동산 개발업체가 참여하는 행사장마다 찾아다니며 시위를 하고 있다. 빈부격차가 극심한 홍콩에서 서민들이 주도하는 이런 조직적인 움직임은 전례가 드문 일이다. 홍콩의 언론도 자발적인 민생(民生) 운동 관점에서 비중 있게 보도하고 있다.

 중국도 내수 진작한다고 풀린 돈으로 지방 정부와 부동산개발업자, 금융기관이 결탁해 부동산 부패를 양산하고 있다. 이런 비리는 생존 하한선에 근접한 바닥층 인민을 결집시킬 수밖에 없다. 천안문 사태를 불러왔던 물가 폭등도 위험수위다. 지난 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목표치인 3%를 훌쩍 넘은 5.4%를 기록했다. 민생고(民生苦)가 발등의 불인 것이다.

 중국 전역에서 시도된 ‘모리화(茉莉花·재스민 꽃) 혁명’ 집회는 찻잔 속 미풍으로 끝났지만 당국자 누구도 자유와 인권에 대한 보편적 열망마저 사라졌으리라고 판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계층 양극화와 민생고가 곪아터지면 잠복했던 열망도 되살아난다. 중국의 재스민 혁명은 발 아래 휴화산 같은 것이다.

정용환 홍콩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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