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분위기에 춤춘 '검열의 잣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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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50년간 권위적인 정권이 집권해 온 탓에 한국 문화계는 항상 '검열' 이라는 족쇄에 시달려 왔다.
권력의 정당성이 취약했던 과거 정권은 자유로운 사상과 의식의 싹이 보이기만 해도 지레 겁먹고 가차없이 짓밟았다.
물론 때때로 상식을 벗어난 작품이 정권차원과는 별개로 사회적 논란이 되기도 했다.

사회적인 공기가 조금씩 풀리는 1990년대 이전까지 검열의 잣대는 주로 반정권적인 요소를 띤 작품들을 제재하는 쪽에 무게가 실렸다.심지어 외국의 저질문화를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한 해 평균 80곡 이상의 팝송이 방송금지 처분을 받았다.
'65년 이후 80년대 초까지 7백50곡이나 방송금지 됐다.

출판분야에서는 사회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던 계간지 '창작과 비평' 이 80년 군부정권의 등장과 함께 폐간됐고 85년엔 아예 출판사 등록이 취소되기도 했다.'이에 창작과 비평사는 '창작사' 로 이름을 바꿔 출판을 계속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
90년대 들어 정치적인 문제보다는 소비생활을 향유하는데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면서 검열의 방향도 성(性)윤리 쪽으로 바뀌었다.
91년 '광마일기' 로 간행물윤리위원회로부터 제재를 받았던 연세대 마광수 교수는 다음 해 또 다시 '즐거운 사라' 를 출판해 결국 검찰에 의해 구속된다.

"방황하는 한 여대생의 시각을 통해 전환기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치관 문제를 제시했다" 는 저자의 주장을 검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이번에 문제가 된 '거짓말' 의 원작 '내게 거짓말을 해봐' 의 작가 장정일도 97년 구속돼 다시 한번 외설과 예술의 경계에 대한 시비를 불렀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 4집 음반의 일부 가사 대신 '삑' 하는 기계음을 삽입해 공윤의 가사 심의에 항의한 것도 이 즈음(95년말)이었다.

영화분야에서는 94년 11월 영화 '해적' 의 제작사가 공연윤리위원회의 필름 삭제에 항의해 무삭제 필름으로 상영하다 적발돼 상영 중단 소동을 빚었다.93년에는 프랑스 감독 루이 말의 '데미지' 가 수입불가 판정을 받아 논란을 불렀다.

공윤은 아버지가 아들의 연인과 관계를 맺는다는 부분이 사회적인 통념상 불륜의 빌미가 된다며 수입을 허가하지 않았다.
1년뒤 수입이 되긴 했으나 이후 영화에서 정상적인 남녀관계를 어디까지 볼 것인가하는 문제를 남겼다.
그러나 동성애가 사회적인 화제로 떠오르면서 '데미지' 정도의 영화는 오히려 온화한 (□) 영화로 밀려나게 된다.

97년 남자들간의 동성애를 다룬 '해피 투게더' (왕자웨이 감독)가 수입불가 판정을 받고 논란이 된 것은 이같은 사회분위기를 배경에 깔고 있었다.
96년말 '영상물'에 대한' 사전 검열은 위헌' 이라는 판정이 나온 이후 외형상 영화에 대한 검열은 사라졌다.

음반이나 서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경우 등급심의위원회가 12세-15세-18세이상 관람가능 여부를 판정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하지만 이번 '거짓말' 사건에서처럼 등급이 부여된 영화가 다시 시민단체나 검찰에 의해 문제가 되기는 처음이다.
영화계 일각에서는 성인영화 전용관의 도입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그러나 음란물을 규제하는 '풍속법' 과 같은 형법과 '국가보안법' 이 잔존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성인영화 전용관 허용은 또 다른 충돌을 부를 소지가 있다.

따라서 '예술과 외술' 이라는, 때때로 상업적으로 이용되기도 하는 이 해묵은 논쟁을 생산적으로 마감하기 위해서는 이번 사건을 보다 폭넓은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게 문화계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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