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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 “바랴그(Varyag)” 와 “스랑(施琅)”

중앙일보

입력

서울의 정동 주한 러시아대사관의 대사 접견실에는 석양을 배경으로 20세기초의 거대한 군함의 그림이 자랑스럽게 걸려있다. 제정 러시아의 순양함 바랴그(Varyag)의 위용이다.

1904년 2. 9. 일본군은 선전포고도 없이 뤼순의 러시아 함대에 대한 야습과 함께 인천(제물포) 앞바다에 정박중인 바랴그호를 선제공격하였다. 바랴그호는 대파되어 31명이 사망하고 191명이 부상하였음에도 결사항전 항복 대신에 自沈을 선택하였다. 그로부터 3년후 일본군은 바랴그호를 인양 일본의 순양함 “소야(宗谷)“로 개명하였다. 소야호는 그 후 세계 제1차대전시 일본의 동맹국이 된 러시아에 대한 우의의 상징으로 반환되어 본래의 母港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갔다가 퇴역 해체되었다. 2002년에는 인천시립박물관 지하 수장고에서 98년 전 장열한 최후를 맞이한 바랴그호의 함기가 우연히 발견되어 ”러시아의 영혼“으로서 반환(임대)되었다.

바랴그인은 북유럽 바다의 정복자 바이킹의 후예로 “발틱의 전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용감하여 옛 비잔틴제국의 황제 근위병의 영예를 안고 구소련에서는 군함의 이름으로 바랴그가 자주 보인다. 우크라이나로부터 항모 바랴그를 구입한 중국은 이를 개조 이번 7.1. 진수한다. 항모이름을 “스랑(施琅)”으로 정함에 따라 350년 전 명나라 말기-청나라 초기의 왕조 변혁기에 수군(水軍)제독으로 활약했던 “스랑”(1621-1696)장군이 다시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스랑은 명(明)말기 정지룡(鄭芝龍) 휘하의 젊은 부장이었다. 지룡이 청(淸)에 투항했을 때 일본부인과 사이에 태어난 아들 청공(成功∙1624-1662)은 아버지와 달리 반청부명(反淸復明)의 공을 세워 남명(南明)의 황제로부터 주성(朱姓)을 받아 “국성야(國姓爺)”로 불리었다.

스랑도 처음에는 청에 투항하였으나 얼마후 마음을 바꾸어 청공의 항청(抗淸)군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사이가 좋지 않았던 두 사람에게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스랑은 청공이 아끼는 휘하의 장군 증덕(曾德)에게 죄를 물어 군법으로 처단했다. 이를 분개한 청공은 스랑을 죽이고저 하였다. 스랑은 청에 다시 투항하였다. 그러나 청공은 스랑의 아버지와 형제등을 모두 붙잡아 죽인다.

청공은 항청북벌이 실패하자 근거지 마련을 위해 타이완의 화란인을 쫓아 내었다. 그리고 루손섬(현재 필립핀)의 스페인인마저 쫓아 내고저 하였다. 그때 아들 경(經)의 유모와의 불미스러운 관계를 알게 된 청공은 홧병을 얻어 38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타이완을 지배하고 있던 청공의 아들 경(經)이 죽자 후계문제로 내부가 불화에 빠졌다. 이러한 기회를 이용 스랑이 지휘하는 청군에 의해 1863. 7월 타이완은 함락된다. 반청세력을 정리한 청조정은 타이완에 공도(空島)정책을 취하고저 한다. 그러나 스랑은 둔병진수(屯兵鎭守)를 주청하여 강희제(康熙帝)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다.

증청공이 타이완에서 화란인을 쫓아 냈다면 스랑은 타이완을 중앙에 귀속케 하여 실질적으로 중국을 통일한 영웅이 된 것이다. 중국이 명초 정화(鄭和)제독이후 소흘히 했던 바다에 다시 관심을 보이면서 타이완을 수복한 스랑을 첫항모의 이름으로 정한 것은 여러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유주열 전 베이징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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