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누구를 위한 교통신호 개편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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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엊그제 서울 광화문과 세종로에 낯선 교통신호등이 등장했다. 직진·좌회전이 같이 있는 기존의 4색등 대신 3색등이다. 특히 좌회전 차선 위 화살표 3색등을 처음 본 운전자들은 진행해야 하는지 아닌지 혼란스러워했다고 한다. 교통신호등은 그야말로 ‘생명 불’이다. 자칫 헷갈리면 큰 사고로 이어진다. 이런 신호체계 개편을 사전 홍보도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그것도 변두리부터 시범 운영하는 것도 아니고 도심에 밀어붙인 교통당국의 강심장이 놀랍다.

 더구나 ‘좌회전 후 직진’에서 ‘직진 후 좌회전’으로 변경된 게 지난해 1월이다. 경찰청은 이때도 “교차로 소통이 3.8% 개선됐다”며 뒤늦게 홍보에 나섰다. 그런데 겨우 1년여 지나서 이번에는 교통신호등까지 바꾼다니 어지러워서 운전하기도 힘들다는 불평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경찰청은 ‘국제기준’을 내세웠다. 하지만 선진국 어디에서도 이런 신호등을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일본·프랑스·중국·홍콩 모두가 제각각 다른 체계다. 경찰청이 제시한 1968년 유엔의 빈 협약도 ‘3색등’으로만 제시하고 있다. 이는 ‘비보호 좌회전’을 전제로 한 것이다. 우리처럼 교통량이 많은 교차로에서는 좌회전을 원천 금지하지 않는 이상 적용하기 힘든 신호체계다. 그래서 엊그제 선보인 ‘3색등’도 결국 좌회전용을 따로 설치한 것 아닌가. 좌회전 화살표 신호등은 빈 협약에 없다.

 경찰청은 또 원활한 교통 흐름을 위해서라지만, 실제로 측정한 적은 없다는 게 관계자 답변이다. 결국 시민 편의나 도로여건, 운전습관 등을 고려하지 않고 국가경쟁력 강화란 구실을 붙여 변변한 공청회나 여론수렴도 없이 도로교통법 개정까지 일사천리로 밀어붙인 것이다.

 신호등 교체에 들어가는 세금도 적지 않다. 서울 11곳에 시범 설치하는 데만 6900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전국 교차로에 설치된 신호기는 모두 5만7419개다. 이를 3색등으로 교체할 경우 신호등 값만 개당 52만9000원씩 무려 300억원 이상 든다. 신호제어기 교체비용을 포함하면 몇 배로 늘어날 수 있다. 지난해 3월 서울시내 교통신호등이 모두 발광다이오드(LED)로 교체됐는데, 또다시 바꿔야 할 판이다. 업자만 반색하게 생겼다. 과연 누구를 위해 교통신호등을 바꾸는지 납득할 수가 없다.

 교통신호등은 바꿀 때마다 이런저런 잡음이 뒤따랐다. 대표적인 것이 1980년대 구형 신호등을 사각형으로 바꿀 때로, 대통령 친인척이 운영하는 회사가 수주하면서 특혜 시비가 일었다. 직진·좌회전 4색등 체제도 이 시기 도입돼 전국 교차로마다 신호등을 교체하느라 공사판이 벌어졌고, 결국 5공 비리 수사에서 대표적인 친인척 비리로 드러났다.

 물론 신호체계는 안전과 편의를 위해 필요하면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곤란하다. 예상되는 효과와 비용, 편익을 꼼꼼히 따지고 충분한 검토와 홍보를 거쳐야 한다. 무엇보다 시민 안전이 달린 문제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