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의 세상읽기

일본이 우정으로 답할 차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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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이 맞다면 대만은 일본의 친구가 될 자격이 있다. 사상 최악의 대지진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일본을 돕는 일에 가장 적극적인 나라가 대만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시사주간지 슈칸신초(週刊新潮) 최신호에 따르면 동일본 대지진과 관련한 구호성금 모금액에서 세계 1위를 기록 중인 나라가 대만이다. 3·11 대지진 이후 한 달 동안 대만인들이 기탁한 성금은 110억2000만 엔(약 1466억원)으로, 미국인들이 낸 성금보다 많다고 한다. 잡지는 “일본인들은 대만의 성금액이 세계 1위인데 놀라고 있다”며 “대만인들이야말로 어려움을 같이하는 진정한 친구임을 알게 됐다”고 보도했다.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바로 ‘동일본 대지진 관련 정보’ 창이 뜬다. 영어와 중국어·한국어 등 세 가지 언어로 대지진과 관련한 각종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전 세계 136개 국가에서 답지한 지원 내역도 소상하게 소개돼 있다. 하지만 이것만 봐서는 어느 나라가 얼마를 지원했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성금액을 일일이 밝히기 어려운 측면이 있을 것이다. 상주(喪主)가 부의금을 공개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일러스트=강일구]



 미국의 모금액이 1억5000만 달러(약 1633억원)를 넘어섰다는 지난달 29일자 워싱턴발 외신 보도도 있는 만큼 대만의 성금액이 실제로 미국을 앞질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대만의 대일(對日) 지원 열기가 다른 나라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뜨거운 것은 확실하다. 인구로 따져 미국의 10분의 1도 안 되는 나라가 미국과 맞먹는 성금을 모았으니 말이다.

 3·11 대지진이 발생하자마자 대만인들은 자기 일인 양 발벗고 나섰다. 400t의 구호물자를 가장 먼저 보낸 것도 대만이었다. 여야 국회의원들과 함께 하루치 봉급을 성금으로 낸 마잉주(馬英九) 총통은 텔레비전의 모금 생방송에 직접 출연해 일본을 돕자고 호소했다. 대만 CTS 방송이 진행한 생방송에는 100여 명의 연예인이 참가해 4시간 만에 7억8000만 대만달러(약 293억원)를 모금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결혼 축의금 전액을 성금으로 낸 배우도 있었다. 대만 정부 집계에 따르면 이달 12일 현재 총 모금액은 40억1000만 대만달러(약 1504억원)로, 그중 91%인 36억5700만 대만달러가 일반인이 적십자 등 9개 민간단체를 통해 낸 돈이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대만은 세계에서 지진 활동이 가장 활발한 환태평양지진대에 속해 있다. 크고 작은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 20세기에만 세 번의 대지진이 있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것은 1999년 9·21 대지진으로, 2321명이 사망하고 57명이 실종됐다. 당시 가장 적극적으로 구호의 손길을 내민 나라가 일본이었다. 일본은 해외 구조단 중 최대 규모인 145명을 급파했고, 11억 대만달러(약 412억원)의 구호성금을 전달했다. 지진에 관한 한 대만은 일본과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입장일 수밖에 없다. 이번의 일본 지원 열기는 12년 전 일본에 진 빚을 갚는다는 보은(報恩)의 성격이 강하다는 게 유명량 주한대만대표부 공보관의 설명이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대만도 일본의 식민지였다. 청·일전쟁에서 패한 중국이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대만을 일본에 할양한 1895년부터 일제가 패망한 1945년까지 50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우리보다 더 긴 식민통치를 경험했지만 일본에 대한 감정은 우리와 다르다. 반일(反日) 정서가 별로 없다. 점령 초기 일부 저항이 있었지만 ‘3·1운동’ 같은 조직적이고 전국적인 저항은 없었다. 나라를 빼앗겼다는 인식보다 지배계급이 중국 대륙의 본토인에서 일본인으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의 문명기 연구교수는 “‘개가 가고 나니 돼지가 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제에 이어 대만을 통치한 국민당 정부에 대한 대만인들의 반감이 컸다”면서 “이것이 일본 지배에 대한 착시 효과를 일으킨 측면도 있다”고 말한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한 달 동안 한국에서 588억원의 성금이 걷혔다. 다른 나라를 돕기 위해 모은 성금으로는 역대 최고액이다.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조차 모금에 동참했다. 독도를 일본 영토로 기술한 일본의 역사 교과서 문제만 없었다면 더 걷혔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 대만처럼 일본에 신세 진 일도 없다.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는 순수한 인도주의적 동정심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우정을 돈으로 따질 순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돈의 크기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마음이다. 은혜를 갚는 마음이 소중한 만큼 곤경에 처한 남을 돕는 순수한 마음도 소중하다. 한국과 대만이 모은 성금 자체는 사실 일본에 중요한 게 아닐 수 있다. 없어도 그만일지 모른다. 일본이 진심으로 감사해야 할 것은 한때 식민지였던 두 나라 국민이 보여준 우정이다. 이젠 일본이 우정으로 답할 차례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