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박태욱 대기자의 경제 패트롤

다시 ‘안전’을 생각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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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박태욱
대기자

동일본 대지진이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저 자연재해뿐이었다면 벌써 복구사업이 한창 벌어져야 할 시점이지만 일본은 여전히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연재해의 2차적 피해라고 할까, 후쿠시마(福島) 원자력발전소 사고에 따른 그늘은 넓고 깊게 일본 열도에 드리우고 있다. 모내기를 앞두고 사고 원전 일정 범위 내의 논엔 농사 금지 조치가 검토되는 등 잘 수습된다 해도 여파는 해를 넘길 기세다.

 지난주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일본 원전 사고의 여파가 분명한 방사성물질이 한반도 전역의 관측소에서 관측됐고, 경기도 일부 학교는 휴교조치를 내리는 등 나름의 대비책을 마련해 시행했다. 그 두려움의 근거에 대해 사려 깊은, 다른 시·도에서도 따라 했어야 마땅한 조치란 주장도 나왔다. 1년 내내 먹고 쐬어 봐야 X선 한 번 찍는 것의 수천~수만 분의 1이라는 당국 발표도 두려움을 없애지 못했다.

 3년 전, 온 나라가 들썩였던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광우병 소동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 ‘안전, 그 엄중함에 대하여’(본지 2008년 6월 27일자 35면)란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소동의 진원과 행태에 대해서는 지금도 동의하지 않지만 그를 계기로 우리 사회가 ‘안전’이란 문제에 대해 혁명적 전환을 이루기를 바랐고, 시민사회가 보여준 촛불의 에너지가 이 나라 안전을 한 차원 높이는 동력이 되기를 기대했었다.

 방사성물질이 한반도로 날아오면서 보여준 우리 사회의 여러 모습만 보면 안전에 대한 각성 수준은 ‘안전 불감증’이란 자조 섞인 진단을 비웃을 만큼 치열했다. 당국 발표를 ‘과학적 사실’로 믿는 나 같은 사람이 현 수준의 방사능을 위험요소로 보지 않는다 해서 많은 이들이 걱정하는 것을 기우(杞憂)라 말할 생각은 없다. 안전에 대한 기준-사회적이건 개인적이건-이 철저해서 해 될 건 없기 때문이다.

 국내 원전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다. 물론 국내 원전의 설계 구조나 지질학적 상황이 일본의 사고 원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원전 사고가 초래할 참화를 반드시 막기 위해선 더욱 강화된 안전 기준과 대응시설이 필요하다는 것도 분명하다. 과거 비용·효율 면에서 상정(想定)했던 안전기준이 완전히 허물어진 게 이번 일본의 예다. 비용 문제에 지나치게 경사되지 않았는지, 그 결과 ‘상정’의 범위를 너무 좁게 잡지 않았는지를 살펴 바로잡는 게 우리, 나아가 세계 원전 국가들이 할 일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날아온 극미량의 방사성물질에도 화들짝 놀랄 만큼 우린 안전한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몇 가지 예만 들자. 지난해 교통사고 사망자는 5505명(교통안전공단). 10년 전의 거의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다지만 아직도 자동차 1만 대당 사망은 2.6명 수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3명의 2배 수준, 29개 회원국 중 교통안전 수준은 27위다. 어린이 교통사고 사망자도 10만 명당 2.3명(2007년 기준)으로 OECD 평균(1.6명)을 크게 웃돈다. 지난해 산업재해로 숨진 근로자는 1300여 명, 1만 명당 사망률은 0.92명 수준이다. 이는 독일(0.22)·일본(0.23)의 4배, 미국(0.38)의 3배 가까운 수치다. 황당한 것은 우리의 산업재해율은 0.7% 수준으로 세계 최저 수준이라는 것이다. 3~4%대인 독일·미국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산업재해는 훨씬 적은데 사망은 훨씬 많다는 걸 학계·노동계에선 사업자 측의 은폐가 광범위하게 벌어지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얼마 전 본지(4월 8일자 1면, ‘응급이송 210분…이국종은 절망했다’)에도 나왔듯이 우리 응급체계는 그 숱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항상 제자리다. 이른바 예방가능 사고율(사망자 중 응급조치를 제대로 했으면 살릴 수 있었던 중증외상 환자 비율)은 33% 수준으로 미국(5%대)과 비교하기조차 부끄러운 수준이다.

 가끔씩 드러나는 안전에 대한 치열한 인식과, 앞서의 통계들을 접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자괴감, 그 사이의 간극을 나는 해명할 능력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안전한 사회가 확률을 따지기 어려운 저 멀리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옆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대응에서 시작된다는 것만큼은 말하고 싶다.

박태욱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