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무산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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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탈북자들의 암울한 현실을 다룬 ‘무산일기’.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에게 탈북자란 TV뉴스에서 보는 존재 이상은 아닐지 모른다. 목숨을 걸고 내려온 이 곳에서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혹은 알려고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박정범 감독의 영화 ‘무산일기’를 보고 나면 이런 생각에 마음 한 구석이 슬그머니 불편해진다. 한 줌의 판타지도 허락하지 않는 이 작품은 그래서 도발적이다. ‘무산일기’의 주인공은 함경북도 무산(茂山)출신 탈북자 전승철이다. 전승철은 탈출 이후 ‘무성할 무(茂)’의 뜻과는 전혀 다른 무산(無産), 즉 가진 게 없는 적빈(赤貧)과 맞닥뜨린다.

 승철은 감독의 말대로 “행복해지려고 탈출했는데 행복해지지 않는 부조리함”을 몸소 겪어야 했던 숱한 탈북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 시급 4000원을 받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하는, 그마저도 ‘125’로 시작하는 탈북자 주민등록번호 때문에 쉽지 않은, 그래서 늘 입버릇처럼 “잘 할 수 있습니다”를 달고 사는 승철. 그의 탈출구 없는 일상이 답답하게 펼쳐진다. 탈북자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으면서 정착엔 아무 도움도 주지 않으려는 우리의 자화상도 그려진다. 승철이 은근히 마음에 품은 노래방 주인 딸 숙영(강은진)이 대표적이다.

  숙영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승철을 외면한다. 승철이 남한사회에서 단 한군데 마음 붙일 곳이라 여겼던 교회는 냉정하고 위선적인 장소로 그려진다. 사람들한테 치여 튕겨 나온 탈북자가 정을 주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개라는 설정도 비극적이다. 보살피던 백구가 길거리에서 사고로 죽는 마지막 장면은 너무나 급작스러워 마치 얼굴을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마저 든다. 얼떨떨함, 당혹감, 위화감 등의 단어가 동시에 떠오르는 장면이다. 승철 등 탈북자들의 자리에 한국사회의 빈곤층을 대입시켜도 영화의 울림은 잦아들지 않는다. ‘무산일기’의 여러 뛰어난 점 중 하나다.

 ‘무산일기’는 감독이 예전에 찍었던 단편 ‘125 전승철’을 장편으로 만든 것이다. 한국영화에서 쉽게 보기 힘들었던 이야기, 그런 소재를 무섭게 파고드는 집요함을 볼 때 이 영화가 상을 많이 탄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런 결과다. 지난해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 신인상인 뉴커런츠상을 시작으로 마라케시영화제 대상, 로테르담영화제 타이거상(대상), 도빌아시안영화제 심사위원상 등 최근까지 수상행진이 이어졌다.

 잊을 수 없는 헤어스타일의 주인공 승철은 박정범 감독이 직접 연기했다. “깡패들에게 맞는 장면을 찍어야 하는데, 배우에게 진짜로 맞으라고 할 수가 없어서” 주연을 하게 됐다고 한다. 14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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