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女論

1920년대 배우자의 조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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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

1926년 잡지 『별건곤』 12월호에는 ‘신여성 구혼경향-신랑 표준도 이렇게 변한다’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신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연애에 눈을 뜨면서 애인이나 남편감으로 원하는 이상형이 시기에 따라 변해 왔다는 것이다.

 초기 신여성들은 ‘문학청년’들에게 마음이 쏠려서 “시 한 구, 소설 한 편만 발표하여도 그 청년에게는 여자의 연애편지가 사면팔방에서 쏟아져” 들어왔다고 한다. 이른바 ‘문학전성시대’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조선의 문사치고 빌어먹지 않게 된 청년이 몇이 못 되게 되니까 연애편지는 그만두고 길에서 만나야 아는 체도 안 하게” 되었다. 그 뒤에는 ‘법학출신자’가, 그 후에는 ‘자유직업으로 돈벌이 괜찮은 장래 의사’가 선호됐다. 1926년 당시에는 “그것저것 다 집어치우고 돈만 있으면 어느 놈이든지 좋다”고 하는 ‘황금만능시대’가 도래했다고 평했다. 이 글에서는 당시 신여성들이 경제력에 따라 배우자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아냥거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같은 잡지 1929년 2월호에는 유명 남녀에게 이상형을 실제 설문한 내용이 실려 있다. ‘내가 좋게 생각하는 남자’에 따르면 여성인사들은 남성을 선택할 때 외모보다는 성격·태도 등을 중시했다. “성격이 여성적인 남자”(차사백), “활발, 다정함, 책임감 많고 대외활동 잘하는 남자”(정칠성), “씩씩하고 의협심 많으며 박학다식한 남자”(박성환) 등을 이상형으로 꼽았다. 잘생긴 외모나 너무 많은 재산을 가진 남성은 오히려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그럼 남성들은 어떤 여성들을 선호했을까? ‘내가 좋게 생각하는 여자’에서 남성들이 중요시한 것은 단연 미모였다. “미가 여성의 전부라고는 생각지 않으나 양성관계에서 미가 토대가 되지 않고 성립된 연애결혼 기타 모든 가정생활은 불행”(김동환)하다고 말한다거나, “흰 달이 눈 속에 비친 듯한 미인, 봄바람에 홍도화 같은 미인”(현진건), 또는 “키 큰 편, 여윈 편, 쌍꺼풀진 눈이 크고 맑아야 하겠고 콧대는 서서 매운 품을 주는”(정인익) 여성이 좋다고 말했다. 학식은 “일자무식한이라도 좋겠다”고 하고, 성격은 쌀쌀맞아도 좋고 정반대로 괄괄해도 좋다고 말했다.

 최근 미혼여성 4명 중 3명 정도가 맞선 상대의 승용차에 따라 호감도가 달라진다는 모 결혼정보회사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서 그런 여성들을 속물이라 비난하는 남성들이 있다. 여성들이 남성의 승용차로 그의 소득 수준, 경제력을 가늠하고, 이에 따라 배우자를 선택한다는 것이 씁쓸한 이야기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남성들은 과연 ‘순수’하게 여성의 인격이나 품성‘만’ 가지고 배우자를 선택하고 있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