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의 "한국계에 대한 차별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소프트방크의 창립자 손정의(孫正義)는 주식회사 일본의 보수주의자들이 자신을 졸부(猝富)로 여기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 그것은 순응하지 않으면 흔히 따돌림당하는 일본 사회에서 그가 이미 어린 시절에 설정해 놓은 역할이다. 孫은 설령 이민 3세라 해도 일본 시민권 취득에 어려움을 겪는 재일한국인으로 자랐다.
손정의는 지난 91년 일본 시민권을 얻었다. 그는 도쿄(東京)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집무실에서 뉴스위크의 조지 워프리츠 도쿄 지국장과 다카야마 히데코 기자를 만나 자신의 꿈과, 오히려 성공의 자극제가 됐던 일본 사회의 편견에 대해 이야기했다.

당신은 일본 경제를 살릴 수 있는가.

우리가 기여할 수 있기 바란다. 모든 진취적 기업인과 벤처 자본가들이 좀더 적극적 역할을 하고 있다.

나스닥은 일본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인가.

증권거래소는 매우 폐쇄적인 시장이었다. 그러나 나스닥 재팬 덕분에 도쿄 증권거래소가 변하고 있다. 모두에게 유리한 일이다.

일본은 인터넷 혁명에 대비가 돼 있나.

최근까지 나는 비관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젊은 기업인들이 “내가 세상을 바꾸겠다”고 호언하고 있다. 일본의 젊은 인터넷 기업인들이 실리콘 밸리 정신을 부르짖고 있다. 나는 점점 더 장래를 낙관하게 됐다.

어떤 장벽이 남아 있는가.

미국에서는 독점기업을 규제하고 신규 사업자들에게 기회를 준다. 반면 일본은 정부가 대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신규 사업자를 규제한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정부에 해주고 싶은 충고는.

인터넷 혁명은 일본에서도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계로 성장해온 삶에 대해 한 마디 한다면.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시민권은 무엇이며 민족이란 무엇인가. 그런 철학적 문제를 두고두고 곱씹었다. 그러나 이젠 그런 시절도 지났고 더이상 신경쓰지 않는다.

어떤 제약을 받았나.

한국계는 공무원이 될 수 없고 선거에 출마하지도 못한다. 일류기업 입사도 안 된다. 친척과 어른들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나는 “그렇다면 차라리 한국 이름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전통적 출세의 길이 막혔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분이 어땠나.

“너희들이 나를 받아주지 않아도 좋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며 정열과 지성을 지닌 인간은 모두 동등하다는 것을 내가 증명해 보이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이 나의 전의(戰意)를 북돋우는 동기가 됐다. 지금보다 젊던 시절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지금은 대부분 잊어버렸다.

캘리포니아로 유학간 계기는?

부모님께 각양각색의 인종과 국적의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가는,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나라에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우셨다. 친척과 친구들, 선생님들 모두 나를 말렸다.
미국에 가보니 다양한 인종과 배경의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열정과 대망을 품은 젊은이라면 남들은 꿈도 못꾸는 엉뚱한 회사를 창업할 수 있었다. 나는 “나도 그런 엉뚱한 사람이 돼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캘리포니아에서 무엇을 배웠나.

미국인들은 훨씬 더 창의적이다. 젊은이들에게도 기성세대와 마찬가지의 기회가 제공된다. 자본이 없어도 훌륭한 사업계획만 있으면 벤처 자본가들이 귀를 기울인다. 일본과는 환경이 다르다. 그것이 큰 힘을 줬다.

정신적 스승을 꼽는다면.

일본에서 기업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혼다(本田)의 창업자와 마쓰시타(松下)의 창업자를 존경한다. 소프트방크를 창업한 뒤로는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를 들 수 있다.

97년 소프트방크의 주가가 하락했을 때 당신이 기존 질서에 도전했다는 비난을 받았는가.

우리는 사업규범을 바꿔보려는 일을 너무 많이 했다. 일부 일본인 중역들은 우리를 부도덕하다고 규탄했다.

그런 비난을 자주 듣는가.

그것을 옛 이야기라고 말할 수는 없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