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유주열] “만(慢)”의 비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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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동부 지방에서 진도 9.0의 강진과 20m가 넘는 해일로 아름답던 해안지방이 순식간에 폐허화 되었다. 그리고 지진과 해일의 영향을 받은 후쿠시마(福島) 원자력발전소의 냉각펌프에 전기가 끊어져 연료봉이 노출되어 방사능 유출사건이 일어났다.

이번 대재난에서 일본은 두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의 잿더미에서 최근까지 세계 제2위의 경제를 일구어 내고 1인당 국민소득이 4만 불 이상으로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살기 좋은 나라였는데 자연의 대재난 앞에서 하나의 깨지기 쉬운 유리 꽃을 연상시켰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일본의 이러한 참사가 天災 뿐 아니라 리더십 부재등 人災의 요인도 많은 데 피해를 입은 일본인들이 비교적 냉정을 잃지않고 차분하게 질서를 지키는 침착과 절제의 모습에 세계인들은 감동을 받고 있다. 이러한 일본인의 모습에 “진화” “교육” “문화” “DNA”등 여러 가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일본 말에 절제한다는 뜻으로 “가망”(我慢)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을 글자로 풀어 보면 “나는 천천히 해도 좋다.”라는 뜻으로 주변을 먼저 배려하려는 마음이 들어 있다. 이렇게 양보와 느림을 미덕으로 삼아 일본어의 "지망“(自慢)이라는 말은 ”스스로의 느림“을 널리 알리는 의미가 자신의 특기 또는 자랑이란 뜻으로 발전 된다.

느림의 미덕은 중국도 뒤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중국을 ”만만디(慢慢的)“의 나라라고 말해 왔다. 이것은 19세기말 산업사회를 성공시킨 서양에서 중국을 비하한 말이지만 사실은 중국인의 차분하고 신중함과 함께 주변을 배려하는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서로 헤어질 때 “만조우(慢走)”라고 한다. 이 말 역시 상대를 배려한 인사이다. 급하게 다니는 것보다 차분한 발걸음을 권하는 친절한 주의로 볼 수 있다.

일본의 지진 해일과 방사능 유출로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일본인의 절제심이 점점 잃어 가는 것이 아닌가하고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특히 외국 특파원사이에서 일본인도 사람인데 그러면 그렇지 하는 입장의 보도가 눈에 띈다. 그러나 오랜 기간 일본에서 생활해 본 경험으로는 일본인이 대재난을 극복해 가는 모습은 너무나 당연한 일본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재난이라면 자연재해든 인공적 核재난이든 우리는 항상 머리에 이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제 어디든 이러한 재난이 우리에게 닥칠 수 있다. 우리도 이번 기회에 “빨리 빨리” 보다 “慢” 자를 먼저 마음에 새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차분하게 주변을 먼저 배려하는 일본의 “가망”정신과 중국의 “만만디”정신을 함께 배워 나가야 할 때이다.

유주열 전 베이징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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