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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戰과 아나키스트 성향, 미국·이스라엘엔 눈엣가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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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호 32면

오늘날 전 세계 진보성향 지식인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한 명을 고르라면 단연 노엄 촘스키(Avram Noam Chomsky·사진)가 떠오른다. 2005년 영국의 학술지인 ‘프로스펙트’지는 촘스키를 ‘현세의 최고 지성인’으로 선정했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진보 지식인의 대부 노엄 촘스키

1928년 필라델피아 교외에서 태어난 촘스키는 우크라이나 유대인 가계에 속한다. 유년 시절 가정에서 히브리어와 이디시어(독일과 동유럽에서 사용된 유대인 언어)를 배웠다. 이후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고 하버드대에서도 박사학위 과정을 밟았다. 촘스키는 러시아 태생의 유대인이며 언어학의 대가인 로만 야콥슨의 추천으로 55년부터 미국 보스턴의 MIT에서 언어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지금도 이 대학 명예교수로 강의를 계속하고 있다. 그는 ‘변형생성이론’이라는 문법체계의 새 학설을 발표하면서 전통적인 구조언어학의 아성을 무너트렸다.

64년 베트남전이 본격화되자 그는 미국과 국제사회가 관심을 보이는 쟁점들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내놓으면서 당시로선 보기 드문 지성인의 현실비판 조류를 열었다. 촘스키는 분명 영재 중 영재다. 그는 자신의 전공인 언어학은 물론 철학·정치학·심리학·수학·자연과학 분야에서도 전문가 이상의 식견을 보인다. 촘스키가 지성인으로 명성을 얻는 이유가 있다. 보통 학자는 권위의식 때문인지 자기 지식에 대한 설명을 어렵게 하지만 촘스키는 어려운 문제도 쉽게 풀어 이해시키는 데 특별한 재주가 있다.

촘스키의 정치적 성향은 한마디로 아나키스트다. 요즈음은 아나키스트라는 용어 대신 ‘자유연합파’ 또는 ‘자유의지적 사회주의자(Libertarian Socialist)’로 부른다. 자유의지적 사회주의자의 시조는 프랑스의 문인인 조제프 데자크(1821∼1868)이며 촘스키는 데자크의 사상을 계승하는 후계 그룹에 속한다. 촘스키가 좌파사상에 경도된 이유는 뭘까. 그는 미국의 대공황이 절정이던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어린 촘스키는 필라델피아 교외의 공장촌에서 자본가에 의해 파괴된 노동자의 고통스러운 삶을 목격했다.

촘스키는 권위적인 정부·기업과 함께 언론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갖고 있다. 촘스키는 사기업에 대해서도 “시공을 초월해 사익만 추구하면서 인류의 보편가치인 평등이나 인권을 도외시하는 사악한 부류”라고 몰아붙인다. 언론에 대해서도 “진실을 도외시하고 현실권력과 광고주와의 공생관계에 종속돼 사회적 합의와 여론을 조작하는 음모집단”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대다수 유대인들이 국제주의자 성향을 보이는 데 반해 2002년 작고한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와 함께 한동안 반(反)세계화 운동을 주도하면서 국제주의, 신자유주의, 시장근본주의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가했다.

촘스키의 반전사상 또한 강렬하다. 그는 미국이 1945년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해 많은 인명을 살상한 것을 개탄했다. 또한 과거 베트남전은 물론 레이건 시절의 그라나다 침공과 조지 W 부시 정부의 아프간전쟁과 이라크전쟁 모두를 규탄했다. 촘스키는 73년 칠레를 비롯한 중남미 국가의 합법적인 정권을 군부쿠데타로 전복시킨 미국 정부와 정보기관의 공작에 대해서도 격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촘스키는 유대인이지만 반(反)시오니스트적 성향도 갖고 있다. 그는 25세인 53년 이스라엘 농업공동체인 키부츠에서 부인과 함께 훈련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곧바로 실망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그는 이스라엘 건국 자체를 평화에 반한 것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탄압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촘스키는 미국·이스라엘에 불편한 존재가 되었다. 특히 이스라엘은 2005년 5월 요르단강 서안의 한 대학에서 강연하기 위해 입국을 신청한 촘스키의 입국을 거부했다.

정의롭고 사리에 맞는 말만 하는 것으로 보이던 촘스키도 간혹 위선자라는 상반된 평판에 시달린다. 그는 항상 여성 권리 신장과 인종차별 철폐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강의하는 학부에는 여성과 유색인종이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또한 촘스키는 입만 열면 엘리트주의를 배격한다고 말하지만 그와 교류하는 인물 거의 모두가 엘리트층이었다는 점에서 세인의 냉소를 자아냈다. 2004년 미국 대선 때는 민주당 존 케리 후보를 지지하면서 ‘차악(次惡)의 선택’이라는 말을 남겨 구설에 올랐다.

촘스키는 한국과도 불편한 인연이 있다. 2008년 우리 국방부는 촘스키의 저서 중 반전사상이 가득한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What Uncle Sam Really Wants·1992년)과 501년: 정복은 계속된다(Year 501: The Conquest Continues·1993년) 등 2개의 책자를 불온서적으로 지정해 촘스키의 반발을 야기한 적이 있다.

촘스키의 이런 언행에 대해 반(反)유대주의자들은 이렇게도 말한다. “촘스키는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 역할을 분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이 짙다.” 쉽게 말해 유대인의 오랜 생존전략, 즉 서로 상반되는 진영에 각각 지도부로 참여해 균형이라는 허울 아래 그들의 세계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는 고차원적인 전략을 수행한다는 시각이다. 그 사례로 유대인은 자본주의도 발전시켰지만 공산주의도 창안해 서로 대립하는 양 진영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점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유대인은 미국의 민주·공화당 양 진영에 모두 포진해 어떤 정권이 들어와도 그들만의 영향력을 유지한다고 한다. 물론 이런 주장을 검증하기는 어렵다. 반유대주의자들의 음모론적 시각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 해도 지구상의 수많은 민족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끈끈한 결속력을 갖고 있다는 유대인 중에서 촘스키처럼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인물이 있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박재선 프랑스 국제행정대학원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외교부 구주국장과 주세네갈 대사, 주보스턴 총영사, 주모로코 대사 등을 역임했다. 유대인과 중동에 관한 글을 많이 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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