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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르포]통독의 후유증 한 세대 넘길 것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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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려대 독문학과 이기식 교수와 독일인 여교수인 K.슈람 교수가 지난 7월말부터 2주 동안 베를린 장벽 붕괴 10년에 접어든 옛 동독지역을 돌아보고 공동집필한 글이다. 지난 11월은 장벽 붕괴 10주년이며 내년 10월은 독일통일 선언 10년이 되는 해다. 두명의 교수가 統獨 현장에서 많은 독일인과의 인터뷰를 거쳐 집필한 이 글에는 통일 이후 옛 동독인들의 삶과 가치관 변화가 잘 나타나 있다. “월간중앙”은 이 글을 통해 남북통일 이후 남북한 사람들이 겪을 수 있는 의식 변화 가능성을 추측하고 한번쯤 민족 통합의 합리적인 방향을 생각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편집자]

지난 89년 당시 필자는 독일 유학생(프랑크푸르트대 독문학 박사과정)
신분으로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필자는 그해 11월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역사적 사건의 현장 속에 있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그리고 연이어 서독으로 몰려드는 동독인들의 물결을 보았다. 프랑크푸르트까지 밀려와 슈퍼에서 산 바나나를 한아름 손에 쥔 동독인들, 그리고 이들을 지켜보며 환호하거나 의아한 눈길을 보내는 서독인들의 모습….

동독에서 바나나는 ‘신분의 상징’으로 통할 정도로 고가의 과일이었다. 그러나 서독에서는 슈퍼에 널려 있을 정도로 흔해빠진 싸구려 과일이 또한 바나나였다. 동독인들에게 서독은 그 비싼 바나나가 헐값으로 넘쳐나는 풍요의 나라였다. 옷차림은 남루했지만 동독인들은 전쟁의 승리자와도 같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거리를 활보했다. 그들의 자화상은 철옹성같은 동독 정권과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독일 통일을 이루어 낸 ‘피플파워’를 보여준 사람들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지난 7월말 필자는 고려대 독문학과 학생 21명, 독일인 여교수 K. 슈람과 함께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올 11월은 베를린 장벽 붕괴 10주년, 내년 10월은 독일의 공식 통일선언 10주년-. 우리는 통일 독일의 현주소를 직접 눈으로 관찰하기 위해 이 여행을 시작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10년이 지나면서 필자에게는 무엇보다 통일이 독일인 개개인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그것은 어찌보면 통일을 갈망하는 분단국가의 한 국민으로서, 그리고 통일을 이룬 독일의 학문을 전공한 한 사람의 교수로서 당연히 생길 법한 궁금증이기도 했다. 역시 이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옛 서독 출신인 K. 슈람 교수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 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사실 필자가 아니더라도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통일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통일이 되면…’이라는 식의 통일 후 사회 변화보다 ‘어떤 방법으로 통일을…’이라고 하는 정치적 방법론에 관해 많은 이야기들을 해왔다. 혹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식의 통일 당위론에 몰입했다.

하지만 통일은 정치·경제 체제의 통합일 뿐 아니라 사회의 통합이므로 양자의 문화가 섞이고 사람도 섞이게 마련이다. 따라서 개개인이 겪을 극심한 운명의 변화를 상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때마침 슈람 교수가 분단국가에서 통일국가로 변모한 지 10년이 된 독일을 돌아보면서 다양한 직군의 독일인을 인터뷰함으로써 이같은 궁금증을 풀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우리는 여행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이 여행은 한국인인 필자로서는 남북통일 뒤 우리가 겪게 될 사람들의 의식 변화를 독일인들을 통해 어느 정도 추측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결국 통일의 성패는 단시간 내에 뜯어고칠 수 있는 법과 제도의 통합보다 이질적인 사회체제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이 한 체제 속에 뒤섞이면서 얼마나 융합할 수 있느냐 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이번 여행을 통해 이러한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본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우리는 소수이건 다수이건 독일 통일의 수혜자 혹은 피해자들을 만나 개인의 운명 변화, 가치관의 변화를 들어봄으로써 통일에 대한 독일인들의 의식을 점검해 보기로 했다.

이번 여행 기간은 지난 7월24일부터 8월6일까지 2주, 여행 코스는 옛 동독 지역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여러 도시를 거쳐가는 것이었다. 여행 비용은 슈람 교수의 노력으로 독일학술교류처(DAAD)
로부터 상당 부분을 지원받아 해결했다. 이 지면을 빌어 DAAD에 감사를 드린다.

김포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일정 고도를 유지하고 주위의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자 지난 89년부터 90년까지 통독 과정을 현장에서 직접 지켜보았던 필자의 머리 속에는 당시 기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전 동구로 여름 휴가를 떠났던 수백명의 동독 사람들이 우여곡절 끝에 헝가리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밀려왔다. 동독인들은 환희의 눈물을 흘렸고 동독에서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처음 그들의 구호는 ‘우리는 한 민족이다’였다. 그러나 그 구호는 어느새 ‘마르크화(貨)
여, 내게 오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네게 가리라’로 바뀌었다. 동독인들이 진정 원했던 것은 서독의 마르크화, 즉 경제적 풍요였던 것이다.

그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물밀듯 넘어왔다. 그들은 서독의 풍요와 자유에 새삼 놀라며, 바나나를 한아름씩 사들고 마냥 즐거워했다. 서독에 빨리 합병되는 것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5년 안에 서독 생활 수준에 도달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당시 헬무트 콜 총리의 말은 행복에 대한 약속 그 자체였다. 곧이어 90년 동독에서 최초의 자유선거가 실시되었고 통일협상이 이루어졌다. 콜총리는 총선 운동 기간 내내 “옛 동독 지역을 꽃피는 땅으로 만들겠다”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흥분도 한순간, 통일 후 바로 동독에서는 대규모 실업사태가 발생했다. 그리고 서독인들에 대한 불신이 싹트면서 반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옛 동독지역 북쪽에 위치한 슈베린(Schwerin)
에서 가장 남쪽 도시인 드레스덴(Dresden)
까지 몇개 도시를 여행하면서 맨 처음 인터뷰한 사람은 사회주의의 때를 말끔히 씻고 누구보다 발빠르게 시장경제 체제에 적응, 자본가로 화려하게 변신한 노바콥스키(Nowakowski)
였다. 국가대표 복서 출신인 그는 슈베린의 자원재활용 회사 사장으로 변신해 있었다. 분류용 쓰레기더미 한쪽 편에 있는 여러 개의 컨테이너 중 한 사무실 벨을 누르자 날렵한 체구의 노바콥스키가 나타났다.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그는 17년 동안 동·서독 통합 챔피언으로 군림하면서 정부 고위층으로부터 현금 선물을 받는 등 사회적 특권을 톡톡히 누린 인물이었다.

동구의 여러 나라처럼 스포츠를 정책적으로 적극 장려한 동독 정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지만 그는 체제에 만족하지 못하고 52년 헬싱키올림픽 때 서독 복싱팀을 통해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복서로서의 생명이 끝난 후 트럭 운전기사로 일하던 그는 89년 서독에 있던 할머니의 생일을 계기로 부인과 아이들을 동독에 남겨둔 채 서독으로 넘어갔다.

그가 밝힌 탈출 목적은 돈, 즉 경제적 풍요였다. 통일 후 그는 단 한 대의 화물차로 고향 슈베린에서 자원재활용 회사를 창업, 큰 성공을 거두었다. 건평 1백50평짜리 주택에 벤츠 승용차를 굴리는 그는 동독 체제에서 온갖 혜택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대한 그리움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동·서독 통일 후 모든 것이 잘 되었다”고 그는 잘라 말했다. 필자는 노바콥스키를 통해 개인의 경제적 능력과 여유가 통일에 대한 만족도와 직접 연관이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그러나 필자는 이후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러한 가설은 충분히 빗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포츠담에서 만난 마라토너 출신인 부시(Busch)
부부는 우리의 이러한 가설을 여지없이 깨버린 인물이었다. 그는 멕시코올림픽 동메달리스트였다. 그의 부인은 옛 동독시절과 마찬가지로 주택관리 사무소에서, 그리고 그는 잠시 실업자 신세를 거쳐 스포츠 단체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부인은 사회민주당(SPD)
에서 주택문제 담당을 맡고 있기도 했다.

개별 화장실과 샤워장이 갖추어져 있어 옛 동독사람들이 선호하는 아파트에 사는 이 부부의 월 순수입은 3천7백마르크(약 2백40만원)
정도. 이는 독일인 가계 평균 수입을 넘는 액수다. 거기다 조합주택 집세로 고작 월 1백마르크(약 6만5천원)
정도를 내고 있어 다른 사람들이 내는 월세 1천마르크(약 65만원)
이상이라는 점과 비교해 보면 이들의 순수입은 큰 돈이다. 경제적으로 본다면 이들은 통일의 수혜자 축에 낄 만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처지를 참담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실업자 처지도 아니고 수입도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다는 필자의 지적에도 이들은 통일에 대한 불만을 끊임없이 늘어놓았다.

“동독 주민의 50% 이상이 동·서독 국경선을 다시 원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부시 자신도 옛날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했다. 이들은 옛 동독시절의 친밀한 인간관계, 낮은 범죄율, 보조금 제도를 특히 그리워했다.

부시 가족은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동독’이라는 과거에 매달려 있었다. 이들은 완전히 바뀌어 버린 체제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필자가 보기에 이들은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부시 부부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던 동독 미화, 동독에 대한 그리움은 옛 동독 주민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일반적 현상이다. 통일 전에는 동독의 모든 것이 나쁘다고 하다가, 이제는 동독 시절이 좋았다고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여행 도중 만난 많은 사람들은 통일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동독 체제에 대한 향수를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장년 이상 뿐 아니라 젊은이들에게서도 나타났다. 예컨대 베를린 훔볼트대의 한국학과 대학생을 비롯, 대부분의 동독 대학생들이 그랬다. 통독 당시 초등학교 학생이었던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에 대한 불만이 커지자 과거 자기가 친숙했던 체제를 그리워했다.

필자는 이러한 현상이 옛 동독 체제하에서라면 당연히 자신들이 받아야 할 거의 무료에 가까운 대학교육 비용, 그 부모들이 동독 시절 누렸던 사회보장 혜택, 생필품 지급 등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았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을 독일어로 노스탈기(Nostalgie· 향수)
라고 한다. 그런데 옛 동독 사람들이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은 오스탈기(Ostalgie)
라고 한다(독일어로 오스트

Ost)는 동쪽).

동독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랑하는 것이 하나 있다. 모든 것이 서독으로부터 도입되었는데 거꾸로 동독의 것이 서독에 받아들여진 것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빨간 신호등일 때도 차량의 우회전을 허용하는 교통 표시등이다. 그 자랑을 들으면서 필자의 가슴에는 안타까움과 애처로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우리는 여러 도시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동독 주민들이 여전히 경제적 불안감과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물론 그것은 통일 당시 서독이 남발했던 공약(空約)
탓도 있을 것이다. 줄어든 사회보장 제도와 높은 실업률,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두려움, 동·서간 빈부격차 등이 옛 동독인들의 이같은 심리적 회귀현상을 더욱 부채질할 것은 뻔했다.

얼마 전 로자 룩셈부르크 추모 행사에 많은 인파가 몰린 것은 동독인들의 이같은 심정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동독지역 관광도시인 슈트랄준트(Stralsund)
에서 만난 시퍼스같은 사람은 옛 서독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현재 취업재교육센터 운영자다. 다소 쌀쌀맞게 우리를 맞이한 그는 필자의 동료 교수인 슈람에게 어디 출신인지 물었다. 슈람이 서독 출신이라고 말하자 그의 말소리는 작아지고 조심스러워졌다. 그는 냉랭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동독 사람이고, 우리는 저 사람의 고향인 함부르크처럼 많은 산업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의 말에서는 정부와 서독인에 대한 불만이 잔뜩 묻어났다. 그런데 슈람이 다른 일정 때문에 먼저 자리를 뜨자 그의 목소리는 커졌고 동시에 부드럽게 바뀌었다. 동독 시절 석유시추기술학교의 책임자로 있었던 그는 자기가 가졌던 직업과 업적에 대한 긍지가 대단했다.

“우리는 가장 단순한 것을 가지고 최고의 것을 만들 수 있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동독의 시추 기술은 최고의 기술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 가장 깊은 곳까지 시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동독 교육에 대한 자랑은 대단했다. 그는 인분으로 사탕을 만들 수 있는 교육을 했다고도 말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서독 점령자들에 의해 규정됐습니다. 저도 어쩔 수 없이 따라 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저와 동독인들의 자존심은 구겨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사회주의 혹은 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뚜렷한 신념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현재의 일보다 과거 동독 시절 자신이 했던 일을 영광스럽게 여겼고 그 영광에 계속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그에게 동독은 하나의 권위였다. 그는 동독 정부가 요구하는 가치관에 따라 평생을 살아왔고 거기에서 즐거움을 느낀 인물이었다. 체제나 사회가 원하지 않은 것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러한 동독 정부와 체제의 권위에 기대어 지내던 그는 동독이 무너지면서 자랑스러웠던 직업을 바꾸게 되자 자기의 인생과 직업이 무가치하게 됐다고 믿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통일 뒤 취업재교육센터 소장이라는 누가 봐도 괜찮은 사회적 위상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통일의 피해자를 자처했다.

그는 “얼마나 많은 동독 기업들이 헐값에 서독으로 넘겨졌는지 모른다”며 “서독 기업들은 동독 기업을 인수하면서 정부 보조금만 타먹고 아예 기업을 망하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런 주장은 사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많은 동독인들은 시퍼스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동독 출신 사람들이 서독 사람들에 대해 갖는 감정은 일반적으로 좋지 않았다. 그런 감정은 장년층·젊은층 할 것 없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예를 들어 베를린에서 만난 한 여대생은 친구들 중 서독 출신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러자 옆에 있는 학생들도 그렇다고 당연한 듯 말했다.

서독인들에 대한 감정은 땅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문제가 생겼을 경우 더욱 심각하다. 서독 출신인 땅의 원주인이 나타나 소유권을 입증하면 옛 동독인들은 매매계약을 통해 매입했다 해도 일체의 보상 없이 땅과 집을 내줘야만 한다. 통독 협약에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베를린에 체류하는 동안 우리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를 한 사람 만날 수 있었다. 옛 동독의 정치범이었던 카이저(Kaiser)
여사였다. 그는 자신이 고초를 겪었던 베를린의 슈타지 감옥에서 관광 안내자 일을 하고 있었다.

좌파 지식인인 그가 슈타지의 주목을 받은 것은 동독의 현실이 사회주의 원이념과는 다르다는 내용의 글을 서독에서 발표했기 때문이었다. 이 글은 서독에서 출판됐다. 그리고 그 뒤 서독 여행 허가를 신청한 것이 문제가 되어 그는 81년부터 3년 2개월 동안 슈타지 감옥에서 고초를 겪었다.

“슈타지 감옥으로 사람들을 수송해 올 때는 생선 수송차로 가장한 ‘닭장차’를 이용했습니다. 2t 가량의 화물차를 9개의 닭장으로 나누었고, 차 바깥에는 ‘싱싱한 생선을 여러분의 식탁까지’라는 광고로 위장했죠. 아무도 모르게 슈타지 감옥으로 이송된 죄인들은 비디오 감시까지 받았고, 소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가죽끈에 묶이는 고초를 당했습니다. 매일 겪는 5시간의 고문을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정신 이상을 일으키기도 했고, 출감 후 정신적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어요.”

그는 1984년 서독에 돈을 받고 팔아 넘겨졌다. 동독은 외화를 구하기 위해 정치범들을 흔하게 서독에 팔아 넘겼다. 필자가 보기에 그의 정치적 신념은 여전히 사회주의에 머물러 있었다. 그 스스로는 모든 이데올로기를 거부한다고 했지만 많은 좌파 지식인의 경우처럼 그도 동독 몰락 후 정신적 방황을 겪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주 행복해 보였다. 현재 51세인 그는 스스로도 40대 이후부터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즐기고 있다고 했다.

통일 이후 나름대로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노바콥스키와 카이저 여사의 공통점은 결국 과거와의 심리적 단절을 쉽게 이루어냈다는 데 있었다. 카이저 여사는 심지어 다시 쳐다보기도 싫을 슈타지 감옥에서 안내인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괴롭힌 슈타지 요원들을 모두 용서할 수 있다고 했다.

이들은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삶의 목표와 이상이 있었기 때문에 동독의 권위체제 혹은 통일 이후 사회 분위기에 쓸리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노바콥스키는 부를 통해 사회적 인정을 받았고, 카이저 여사는 체제 변동 후 과거의 고통을 인정받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통일로 인해 받은 혜택이었다.

우리는 5일 동안이나 머물렀던 베를린을 떠나 에어푸르트(Erfurt)
로 향했다. 그리고 옛 동독에서의 교회 역할에 대해 알아보고자 여자 목사 한 분을 찾았다. 옛 동독 시절 교회는 재야 세력의 모임 장소였다. 이곳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모든 문제를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었다. 하지만 통일 후 어디서나 토론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자 신자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우리가 만난 파벨(Pabel)
목사는 비정치적인 인물처럼 보였다(아니면 고도의 정치적인 인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통일 전 우리가 TV에서 보았던 용감한 시위대들, 촛불 시위, 교회에서의 활발한 시국 토론회 등의 이미지를 그에게서 찾을 수는 없었다. 그는 우리가 독일에서 벌어지는 슈타지 관련자 색출 작업에 대해 묻자 다른 동독인들과 마찬가지로 민감한 태도를 보였다. 슈타지 관련자 색출은 마녀 사냥과 마찬가지며 자신은 그런 마녀 사냥을 싫어한다고 했다.

슈타지에 대해 동·서독인들의 태도는 분명히 엇갈린다. 서독인들의 경우 슈타지 관련자 색출과 처벌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보인다. 하지만 동독인들은 그런 서독인들의 태도에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슈타지 문제를 빌미로 동독 문화 전체를 제거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슈타지의 직접 피해자인 카이저 여사를 제외한 다른 동독인들은 슈타지 문제에 둔감하거나 슈타지의 행적 추궁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었다. 동독 출신들은 이제는 더 이상 과거에 대해 듣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슈타지 전시회의 한 안내인은 “나치 과거에 대한 청산 작업을 한 것이 한 세대가 지난 60년대였다면, 동독 과거에 대한 청산 작업도 한 세대가 지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체코 국경 가까이 있는 남부 관광도시 드레스덴에서 우리는 옛 동독 공산당의 후신인 민주사회당(PDS)
당원들의 환영을 받았다. 애초 우리의 인터뷰 요청에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 물었던 이들은 우리가 작센주 지구당을 방문하자 환대했다. 이들은 우리가 남한에서 왔는지 북한에서 왔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필자는 이곳에서 쉐더-베데킨트(Scheder-Wederkind)
여사를 만났다. 통독 전 국영 축산협회의 간부였던 그는 지금은 작센주 민사당의 재무담당 책임자로 있다. 옛 공산당에는 68년, 현재 민사당에는 93년에 입당했다.

“나는 가정과 학교에서 정치교육을 받았으며, 성장하면서 부모와 선생님의 가르침에 대해 한번도 갈등을 느껴본 적이 없었어요. 동독 시절에는 체제와 질서에 순응하면서 살았지요. 하지만 지금은 적극적으로 살기 위해 야당에 입당해 활동하고 있어요.”

집권당과 맞서는 야당 활동이란 적어도 동독 시절 철저한 교육을 받아온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통일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는 많은 반성을 했다고 했다. 그는 공산당원 시절 시키는 대로 순응하는 것을 최고의 선으로 여겼던 자신의 가치관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했다.

그는 통일 전에는 13평 정도의 아파트에 목욕탕도 없이 석탄으로 난방을 했으나 통일 후에는 목욕탕을 갖춘 23평 정도의 아파트에 가스로 난방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역시 외적인 여건의 개선에도 불구하고 통일 전 자신이 가졌던 사회적 위상이나 긍지 등에서는 손해를 본 편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7월 말부터 2주 동안 옛 동독 지역의 여러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만나면서 얻은 결론은 통일로 인한 만족도에서 경제적 요인은 부차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심리적 요인이었다. 자신을 통일의 수혜자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피해자로 생각하는가의 여부는 각 개인이 통일을 심정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정리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심리적 요인이 중요하다고 해서 물질적 요인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동독의 실업률은 17%이고 물질적으로 통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들은 아무도 우리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여기에 소개된 사람들은 대부분 물질적 요인이 통일 만족도에 절대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노바콥스키는 벌써 성공한 자본가가 돼 있었고 쉐더-베데킨트 여사와 목사인 파벨 여사의 경우 주택 사정이 나아지거나 자주 외국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재야 출신인 카이저 여사는 형편없는 경제사정에도 별로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퍼스나 부시 가족의 경우는 좋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낮아진 사회적 위상을 더 아쉬워했다.

동독 사람들은 시장에 물건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그것을 통일의 혜택으로 보지 않는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들에게서 많이 발견할 수 있었던 점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그들은 지출보다 저축에 신경을 많이 썼다. 수입이 적건 많건 안정된 직업과 기본 생활이 보장되던 체체와 달리 실업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듯했다.

부시 가족의 경우도 독일 연방 은행원도 많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그런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심리적 요인이 개인들의 경제 행위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또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동독 사람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수치심과 콤플렉스를 짐작할 수 있었다. 수십만명이 89년 가을에 서독으로 넘어가, 마치 동물원 원숭이처럼 바나나를 선물받기도 했다는 사실, 현재 동독의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남아있는 것이 없다는 현실 인식 등이 이러한 수치심의 큰 원인이었다. 실제로 한 여대생은 이에 대해 눈물까지 흘렸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불안감과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각 개인의 미비한 적응능력 등이 오스탈기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이런 배경에서 동독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현 사민당 정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통일에 대한 후회를 늘어놓고 있다. 그 불만은 얼마 전 베를린선거에서 나타났다. 옛 공산당의 후신이 동베를린에서 제1야당으로 약진하고 현 집권 사민당은 옛 동·서 베를린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 것이다.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서 여전히 동·서독의 격차는 남아있고 양지역 주민간 마음 속 장벽은 허물어지지 않고 있다. 옛 동독 주민들은 해가 거듭할수록 통일에 대한 실망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떨고 있다. 이에 비해 서독 주민들은 통일로 인해 자신들의 경제적 부담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고 불평한다.

‘준비된 통일’에도 불구하고 아직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독일의 모습은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독일 통일의 후유증―, 이것은 적어도 한 세대는 넘겨야 사라질 것 같다.

글 이기식·K.슈람 고려대 독문학과 교수
월간중앙(http://win.joongang.co.kr) 제 289호 1999.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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