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간 해도 힘든 감정 표현, 연아의 2분50초 기대돼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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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1. 올 2월, 국립발레단은 고전 발레 ‘지젤’을 9년 만에 무대에 올렸다. 나흘간 다섯 번의 공연은 전회 매진됐다. 4층 추가석과 시야 장애석까지 오픈했지만 30여 분 만에 티켓은 또다시 동났다. 1962년 발레단 창단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2. 국립발레단의 ‘지젤’을 놓친 팬들은 또 다른 ‘지젤’을 기다린다. 3월 ‘피겨 퀸’ 김연아(21·고려대)가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2010~2011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피겨선수권대회(21~27일)에서 ‘지젤’로 변신한다. 쇼트프로그램 배경곡으로 ‘지젤’을 선정한 그는 “음악에 담긴 다양한 스토리를 잘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


 성공적으로 지젤을 내려놓은 국립발레단의 수석무용수 김주원(33)씨를 만났다. 그는 “두 달 정도 지젤로 살았다. 정신적·육체적으로 많은 것을 쏟아부었다. 많이 배우고, 많이 빠져있었고, 많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김주원씨는 “백조의 호수가 주역 무용수 등극을 인정받는 작품이라면, 최고의 발레리나로 인정받기 위한 작품이 지젤”이라고 말했다. 16세 소녀가 한 남자와 사랑을 하고, 배신을 당해 미쳐 자결하고, 춤추는 요정 ‘윌리’가 된 뒤에도 사랑하는 남자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돕는 이야기. 그는 “보여줘야 할 감정선이 많은 작품이다. 1막에서는 사랑의 환희, 실연의 아픔, 죽음까지 표현해야 하는데 2막에서는 감정을 추스르고 ‘공기의 요정’처럼 무표정 속에서도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가올 지젤, 김연아의 소식을 김주원씨도 알고 있었다. 그는 “김연아는 스무 살을 갓 넘었으니 아무래도 1막의 발랄한 지젤로 분하지 않을까”라고 예상하며 “사실 우리는 두 시간 안에서 지젤을 보여주지만, 김연아는 2분50초 안에 소화해야 한다. 스케이팅 기술을 쓰면서 감정까지 보이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김연아에 앞서 안도 미키·나카노 유카리(이상 일본) 등이 빙판 위에서 지젤을 선보였다. 김주원씨는 “피겨스케이팅에 대해 내가 판단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다. 다만 두 선수 다 지젤의 감정선을 몸짓으로 표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배경곡이 지젤일 뿐”이라면서 “둘 다 서곡과 1막, 2막의 곡들이 두서없이 편곡됐다. 나카노의 지젤은 발랄하다. 안도의 지젤은 분위기 있고 슬프다. 둘의 취향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지젤’만 보고도 두 선수가 선호하는 피겨곡 경향을 짚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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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평론가 한정호씨는 “김연아의 상체 움직임은 거의 발레리나 수준이다. 상체로 많은 감정을 표현하는데, 일부 발레리나는 ‘우리는 평생을 익히는 것을 김연아는 타고난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면서 “김연아의 아름다운 이너바우어는 지젤과 정말 잘 어울린다. 등과 가슴을 여는 동작은 발레리나 수준이다. 이번 프로그램에 이너바우어가 들어간다면 굉장히 멋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주원씨의 평도 마찬가지. 그는 “김연아가 캐나다의 ‘전설’ 이블린 하트에게 발레를 배웠다고 들었다. 내가 러시아의 학교를 다닐 때도 어린 피겨 선수들이 발레 교습을 받으러 오곤 했다. 발레와 피겨는 어떤 면에서 다르지만, 어떤 면에서는 맞닿아 있다. 그래서 김연아의 ‘지젤’을 더욱 기대하고 있다. 표현력이 좋은 선수니 특정한 모습의 지젤을 꼭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연아의 지젤이 정말 보고 싶다”고 말했다.

 김주원씨는 또 “지난해 밴쿠버 올림픽 때 응원을 많이 했다. 빙판에 홀로 선 모습을 보고 함께 눈물도 흘렸다. 무대 위 고독이 어떤 것인지 잘 알기 때문”이라며 “올림픽 뒤 다시 경쟁 무대에 도전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을 것이다. 보름 뒤 공개될 ‘김연아표 지젤’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고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온누리 기자

◆지젤=프랑스 작곡가 아돌프 아당이 작곡한 2막짜리 발레음악. 시골 처녀 지젤이 신분을 숨긴 귀족 알브레히트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아 죽은 뒤 ‘윌리’(결혼하지 않고 죽은 처녀의 영혼)가 되어 숭고한 사랑의 힘으로 알브레히트를 죽음에서 구한다는 줄거리다. 극적인 연기력과 높은 기술을 요하는 작품이어서 역대 발레리나들이 시금석으로 여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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