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의 세상읽기

일본은 고목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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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는 서울에만 있는 게 아니다. 지난주 도쿄(東京)도 제법 쌀쌀했다. 기온은 서울보다 높았지만 체감온도는 그렇지 않았다. 예년 같으면 매화(梅花)가 한창 꽃망울을 터뜨릴 때라지만 날씨 탓인지 활짝 핀 매화를 도쿄에선 구경하기 힘들었다. 수도권을 벗어나 시즈오카(靜岡)현에 있는 이즈(伊豆)반도에 갔더니 봄이 기다리고 있었다. 1200년 된 고찰(古刹) 슈젠지(修禪寺) 주변은 매화가 한창이었다. 멀리 보이는 눈 덮인 후지(富士)산을 배경으로 만발한 매화 나무 숲은 장관이었다.

월북 작가 김용준은 “매화를 보면 조건 없이 마음이 황홀해진다”고 했다. 1948년 간행한 수필집 『근원수필』에서 “제 자라고 싶은 대로 우뚝 뻗어서 제 피고 싶은 대로 피어 오르는 꽃들이 가다가 훌쩍 향기를 보내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있는 체도 않고 은사(隱士)처럼 겸허하게 앉아 있는 폼이 그럴듯하다”고 썼다. 그는 특히 “어느 꽃보다 유덕(有德)한 그 암향(暗香)이 좋다”고 예찬했다.

 매향(梅香)이 아무리 좋아도 일본이 향기에 취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일본 경제단체연합회 유관기관인 경제홍보센터(KKC) 초청으로 지난주 일본에 가서 든 생각이다. KKC가 마련한 빡빡한 스케줄에 따라 여러 기업인과 정치인, 학자, 언론인들을 만나보고 내린 결론은 일본인들 스스로 일본을 고목(枯木)으로 여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때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풍성하게 열매를 맺었던 한 그루의 잘 자란 거목(巨木)이 생명의 순환주기 끝자락에서 서서히 늙고 시들어가고 있다고 할까.

이즈반도의 고찰 슈젠지 주변에는 매화가 한창이다. 하지만 지금 일본은 매화 향기를 즐길 상황이 아닌 것 같다. [슈젠지=배명복 순회특파원]



 곡절 끝에 지난주 중의원을 통과한 ‘2011 회계연도 예산안’은 일본의 형편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규모는 92조4000억 엔(약 1290조원)으로 한국의 약 4배다. 세입 중 세수(稅收)는 40조 엔에 불과하고, 그보다 많은 44조3000억 엔을 국채(國債)를 통해 조달하는 것으로 돼 있다. 예산의 거의 절반 가까이(47.9%)를 빚으로 충당하겠다는 것이다. 세출도 문제다. 예산의 23%인 21조5000억 엔을 나랏빚의 원리금 상환에 쓰고, 31%인 28조7000억 엔을 사회보장비로 지출할 계획이다.

 일본의 국가부채는 약 700조 엔으로 국내총생산(GDP)의 200%를 넘어섰다. 세계 최고다. 이자 부담이 갈수록 커지고 있고,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사회복지비 부담도 심각하다. 지난해부터 절대 인구 자체가 감소세로 돌아섰고, 그나마 인구 4명 중 한 명(23.1%)이 65세 이상이다. 경제가 활력을 잃으면서 세수 기반도 약화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추가로 빚을 내 국채 원리금을 갚고 사회복지비를 충당해야 하는 실정이다.

 스기우라 데쓰로(杉浦哲郞) 미즈호종합연구소 전무는 국채의 95%가 일본 내에서 소화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이 유럽국들처럼 재정위기에 빠지는 일은 없을 거라는 분석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재정 부문의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5년 내 심각한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미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가 일본 국채의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고, S&P도 일본의 장기 국가신용등급을 AA에서 AA-로 한 단계 낮췄다. 부정적 평가가 계속해서 이어지면 국채의 안전성에 대한 일본 국민의 믿음도 깨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국가부채는 시한폭탄이란 얘기다.

 젊은이들은 결혼을 않거나 미루고 있고, 결혼을 해도 출산을 기피하고 있다. 평균 수명은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 이런 추세면 1억2700만 명인 인구는 2050년 9500만으로 줄어들고, 인구 10명 중 4명이 65세 이상이 될 거라는 예측도 나와 있다. 젊은이들은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다테이시 노부오(立石信雄) 오므론그룹 상담역은 “종합상사 신입사원의 40%가 해외근무를 꺼리고 있다”며 “일본 젊은이들은 패기와 도전정신을 잃었다”고 한탄했다.

 일본의 오피니언 리더들은 바꾸지 않으면 침몰한다는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해답도 나와 있다. 그러나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할 정치권이 무기력하다. 1년도 못 버티는 단명(短命) 정권이 5대(代)째 이어지고 있다. 리더십을 기대하기 어렵다. 당리당략을 떠나 또 한번의 ‘유신(維新)’이 절실해 보인다. 정치권의 대타협을 통해 ‘구국(救國)의 개혁안’을 도출하고, 거국내각을 통해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만난 일본인들은 한결같이 일단 저지르고 보는 한국인의 도전정신과 위험을 무릅쓰는 용기, 속도감, 활력, 리더십을 칭찬했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법이지만 남 칭찬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신중함은 좋지만 지나치면 돌다리가 부서진다. 여러 면에서 한국은 10~20년의 시차를 두고 일본을 따라가고 있다. 일본이 변해야 한국에도 좋다.

 매화는 늙을수록 아름답다. 뒤틀려 올라간 성긴 가지 위로 띄엄띄엄 몇 개씩 꽃을 피우는 늙은 매화 말이다. 일본이 고목으로 시들어선 안 된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