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의 크리에이터 ⑤ 연출가 윤호진 (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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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호진 연출가는 “연극 처음 할 때 영양실조 걸렸던 것을 떠올리면 세상 정말 많이 변했다. 8월 ‘영웅’뉴욕 공연은 대한민국 뮤지컬의 세계 경쟁력을 입증할 무대”라고 자신했다. [최승식 기자]

치열했다. 뮤지컬 배우 150명의 설문 조사로 선정되는 ‘무대 위의 크리에이터’ 마지막회 연출가 부문은 접전이었다. 1위부터 6위까지 여섯명의 연출가가 촘촘히 경합했고, 한 두표차로 순위가 결정됐다. 작곡·극작·안무·음악감독 등에서 1위 득표자가 일찌감치 정해진 것과 다른 양상이었다. 타 창작 부문에 비해 뮤지컬 연출가의 두께가 꽤 두텁게 형성돼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최후의 승자는 28표를 얻은, 대한민국 1세대 뮤지컬 연출가 윤호진(63)씨였다. 1995년 ‘명성황후’로 대형 창작 뮤지컬의 자존심을 곧추 세웠던 윤 연출가는 2009년엔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그린 ‘영웅’으로 녹슬지 않은 연출 실력을 과시했다. ‘세계와 겨뤄도 전혀 뒤지지 않는 한국 뮤지컬의 눈부신 진화’라는 평가와 함께, 지난해 더뮤지컬어워즈와 한국뮤지컬대상에서 나란히 6개 부문을 휩쓸었다. 흥행과 완성도 두 측면에서 모두 합격점을 받았다. 배우들 역시 “선 굵은 연출로 가슴을 강타한다” “관객의 심박수를 정확히 잴 줄 아는 연출가” 등을 이유로 윤 연출가를 지지했다.

 연출가 윤호진을 세상에 처음 알린 작품은 연극 ‘아일랜드’다. 1977년, 그의 나이 겨우 29세때였다. 서슬 퍼런 유신시대에 자유를 갈구하는 죄인 2명의 깊은 이야기는 반향이 컸다. “시인 고은, 소설가 황석영씨 등이 보고 나서 ‘우리가 선전부장을 하겠다’라며 동네방네 소문내 주셨지. 어떻게 검열을 통과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해.” 처음 연습할 땐 작품 해석을 놓고 어려움이 컸다고 한다. “뭐가 확 잡히는 게 없는거야. 대본 접고 배우 2명이랑 한달간 긴급조치 위반 법정에 가 온종일 지켜봤어. 피고인들의 최후 진술을 들으면서 신념이 어떤건지, 소신이 무엇인지 몸으로 체득한 거지.” 일상의 흔적에서 연극의 줄기를 잡아내는 연출 스타일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연극은 6개월간 롱런했고, 윤 연출가는 동아연극상을 받았다.

 이후에도 ‘신의 아그네스’ 등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래도 허전했다. “왜 연극은 자립을 못하는지 답답했어.” 제작자 윤호진으로서의 면모는 이때부터 싹이 텄다. 때마침 82년 문예진흥원 연수자로 발탁돼 6개월간 영국 런던에서 생활했다. “뮤지컬 ‘캣츠’를 보고 나오는데, 어안이 벙벙하더라고. 여기에 길이 있겠구나.” 뮤지컬에 대한 갈증으로 그는 84년 뉴욕 NYU 공연학과에 진학했고, 4년간 유학 생활을 보냈다. “작품 구조론에 푹 빠져 지냈지. 치밀한 계산, 수학적 사고가 관객을 움직인다는 것도 알게 됐고.”

 ‘명성황후’에 이어 제작된 ‘영웅’은 올해 해외 진출에 나선다. 8월 뉴욕 링컨센터 무대에 오르고, 중국 중앙희극원과도 협의 중이다. 가슴을 치는 선율, 긴박한 무대 매커니즘 등은 역대 최강이라는 평가다. 그럼에도 여자 스파이로 등장하는 설희의 개연성이 다소 떨어진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윤 연출가는 “무리하게 끌어들인 면이 있지만, 설희가 나오는 기차 장면은 작품에서 가장 아련하고 서정적이다. 선택의 문제다.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것에 집착하다 보면 자칫 기둥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강점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현재 그의 머리를 꽉 채우고 있는 건 최인호 원작의 뮤지컬 ‘몽유도원도’다. 양방언 작곡, 배삼식 극본으로 내년말 공연이 목표다. “견디기 힘든 슬픔과 아픔을 오히려 담담히 그려내, 그 역설이 주는 절절함을 전달하고 싶다. 한폭의 동양화같은 무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회갑을 넘긴 윤 연출가에게 제2의 전성기가 찾아온 듯 보였다.

글=최민우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다른 연출가는 …

외국인 연출가 데이비드 스완이 22표를 얻어 2위에 올랐다. ‘지킬 앤 하이드’ ‘맨 오브 라만차’ ‘올슉업’에 이어 지난해엔 ‘키스 미 케이트’ ‘스팸어랏’ 등을 연이어 연출해 “한국인 다 됐다”란 말까지 듣고 있다. 배우와의 소통을 누구보다 중시한다는 평이다. 3위는 이지나씨가 차지했다. 뮤지컬 ‘대장금’ ‘헤드윅’ ‘광화문 연가’,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등 최근 가장 왕성하게 작업중이다. 독특한 연출 스타일로 이지나만의 브랜드를 구축했다는 평가다.

 4위는 ‘금발이 너무해’ ‘김종욱 찾기’ 등을 연출한 장유정씨다. 장씨는 극작 부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5위는 ‘삼총사’ ‘햄릿’ ‘살인마잭’을 만든 왕용범씨가 차지했고, 6위는 ‘내 마음의 풍금’ ‘천사의 발톱’ 등을 연출했으며 극작 부문 3위였던 조광화씨가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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