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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되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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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지난달 말 일본으로 겨울휴가를 다녀왔다. 4박5일 동안 눈 쌓인 홋카이도 일대를 돌아다녔다. 삿포로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중 부근에 대형서점 ‘기노쿠니야’가 있기에 시간도 때울 겸 들어갔다. 문고판 코너는 그 즈음 일본의 독서 경향을 가장 잘 알게 해주는 곳이다. 역시 노인대국이었다. 고령화 사회에 관한 책들이 가장 눈에 잘 띄는 자리에 진열돼 있었다. 종류도 가지가지. 『계로록(戒老錄)』 등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여성 소설가 소노 아야코(80)의 『노년의 자생력』, 철학자 쓰루미 슌스케(89)의 『노인으로 사는 법』, 평론가 와타나베 쇼이치(81)의 『지적(知的) 여생을 보내는 방법』, 여성 공학자 미나미 가즈코(81)의 『노인으로서의 일상생활 준비』 등 몇 권을 구입했다. 모두 80대 남녀 고령자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동년배 노인, 또는 ‘예비 노인’을 위해 쓴 책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휴가를 다녀온 얼마 뒤 설 연휴를 맞이했다. 고향으로 부모님을 찾아뵌 날 약간의 신경전이 벌어졌다. 나를 비롯한 자식들은 이제 92세 되신 몸 불편한 아버지의 수발을 더 이상 어머니 혼자 들면 안 된다, 그러다 어머니가 먼저 쓰러지신다, 제발 간병인을 쓰자는 쪽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의 수발 받는 것을 내켜 하지 않는다”고 고집하셨다.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는 집이 나 말고도 많을 터. 그러나 끝내 결론에 이르진 못했다.

 다른 집안 어른 댁을 찾아뵈었더니 이번엔 ‘원적외선 이불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께서 사기꾼이나 다름없는 떠돌이 장사치들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건강에 특효라는 128만원짜리 이불을 두 개나 구입하셨다는 것이다. 각종 건강식품, 유사 의료기구를 파는 장사치들이 외롭고 허전한 노인들을 어르고 꾀는 수완이 보통 아니라고 했다. “어머님 어머님” 하며 극진히 대접하다가 막상 물건 사기를 주저하면 “어머님은 아들도 없으신가 보죠?”라고 슬쩍 자존심을 건드린다고 한다.

 역시 노인이 되는 데도 준비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도 먼저 노인이 된 남녀 지식인들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좋은 책을 많이 써주었으면 좋겠는데, 일본에 비해서는 태부족인 것 같다. 노인 복지에 관한 담론도 요즘엔 개인적 책임보다 사회적 책임에 방점이 찍히는 편이고, 그나마 개인적 책임도 연금·저축 등 물질적 측면에 머무는 느낌이다. 노인으로서의 정신적·심리적 준비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많은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소노 아야코의 『노년의 자생력』(원제는 『노년의 재각(才覺)』)은 우리에게도 시사점이 많다. 주장의 핵심은 “노인생활의 기본은 자립과 자율”이라는 것이다. “노인은 자격도 권리도 아니다. 남의 도움을 당연시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움직인다고 생각하라” “부부·자식 간에도 서로 폐 끼치지 말고, 욕구를 절충하는 법을 배워라” “그나마 갖고 있는 돈을 굴려 이익 남길 생각은 아예 하지 마라” “성악설(性惡說)에 의거해 살아라. 그래야 사람의 좋은 면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늙음·질병·죽음과 점차 익숙해지고 친해져라” “노인이 되면 이기심이 늘고 인내가 부족해진다. 남을 더 배려하고, 더 참는 습관을 들여라” “섹스가 불가능하더라도 이성 친구를 많이 사귀어라. 건전한 색기(色氣)를 즐겨라”….

 특히 곧 고령자층에 편입될 712만 명 베이비붐 세대(1955~63년 출생)에 노인이 되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권하고 싶다. 핵심은 자립·자율이다. 젊은 층에 폐 끼치지 말자고 지금부터 각오해야 한다. 다소 분위기가 서늘하지만 예전부터 좋아하던 시 한 편을 소개한다. D H 로런스의 ‘자기연민(Self Pity)’이다. ‘나는 자신을 동정하는 / 야생동물을 보지 못했다. / 얼어죽어 나무에서 떨어지는 작은 새조차도 / 자신을 동정하지 않는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