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몬드 브릭스원작의 눈사람(The Snowman)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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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성탄절이 다가오면 특별한 일이 없는데에도 괜시리 들뜨곤 했던 기억이 있지않은가? 성탄카드를 직접 만들어 본다던가, 구세군의 모금함에 돈 몇푼을 넣곤 부끄러운듯 얼른 그자리를 떠난다던가, 산타할아버지의 붉은색 옷과, 크리스마스 트리, 캐롤, 루돌프 사슴, 크리스마스 선물등... 성탄절과 관련된 것들만 보거나 듣게되어도 괜히 맘은 즐거웠었다.

그중에서도 최고는 역시 눈이었는데, 부산은 눈구경하기가 힘들어 무늬만 눈인, 그야말로 조금만 내려도 감지덕지였었다. 하지만 73년 혹은 74년경, 엄청난 양의 눈을 부산에서도 볼수있었는데, 그 때 지금까지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큰 눈사람을 만들었던 경험이 있다. 그 눈사람을 만든 꼬마는 지금 31세의, 두딸의 아버지가 되어 서울에 있건만, 서울에선 아직까지 그렇게 큰 눈사람을 만들어 본적도, 또 다른사람이 만든 그렇게 큰 눈사람도 보질 못하였다.

그렇게 크게 만든 눈사람이 하루가 다르게 점점 작아지고, 5일쯤 지났을땐 하얀색이 회색에 가깝게 되더니 어느날 어른들이 치워버렸다. 눈사람의 모습이 변형되면서 언젠가는 그려려니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있었으므로 그리 서운하진 않았지만, 정말 서운했던것은 매년 찾아오는 성탄절 당일날 저녁이었다. 그토록 들떴던 마음이 그날 저녁무렵이 되면, 그동안의 모든 즐거웠던 준비들과 흥분됨이 다음날 의미없게 된다고 생각하니 견딜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12월 26일이 되면 모든것이 공허해졌고, 세상은 끝난것 같았고, 신정의 새뱃돈을 기다리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수밖엔 없었다.

다이앤 잭슨감독, 레이몬드 브릭스원작의 〈눈사람 (The Snowman)〉을 처음 봤을때의 느낌은 그것과 비슷했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눈사람이 그렇게 쉽게 녹을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눈사람과 제임스의 한겨울밤의 멋진 여행이후의 결말이 그렇게 나버린것에 적잖은 허무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매년 성탄절날 이 작품을 또다시 기다리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눈사람〉은 레이몬드 브릭스원작의 작품으로는 〈FATHER CHRISTMAS〉와 함께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인데, 파스텔톤의 색채와 둥근 눈사람의 모습, 그리고 피터 오티의 〈Walking In The Air〉와 더불어 〈눈사람〉을 레이몬드 브릭스원작의 최고 애니매이션작품, 혹은 어떤분들에겐 자신의 최고 애니메이션으로 기억남게 만든다. 사실 〈FATHER CHRISTMAS〉의 움직임이 더욱 동적이며 색상도 어떤면에선 더 깔끔하긴하나, 그래도 〈눈사람〉의 고운색채와 조금은 거친 움직임이 더욱 정다웁게 느껴진다.

다이앤 잭슨감독의 〈눈사람〉과는 달리, 데이브 언윈감독의 〈FATHER CHRISTMAS〉 (크리스마스 신부님, 즉 산타할아버지)의 경우 라스 베거스 씬등으로 인하여 조금은 어린이들에게 부적합한 장면도 보여주고 산타 클라우스의 통상개념과는 다른 몇몇 돌출행동으로 혼란을 가져다 주나, 마지막장면에선 〈눈사람〉에서의 제임스와 제임스의 눈사람이 까메오로 출연하기도 하고 (〈눈사람〉에서 제임스가 북극에서 여러 눈사람들과 산타와 춤추는 장면이 묘하게 재현되는데, 자세히보면 제임스의 잠옷색깔이 〈눈사람〉에서의 그것과는 다르다.) 성탄절 아침 모든 어린이들이 산타로부터의 선물을 발견하게되면서 제대로 결말을 맺고있다.

〈눈사람〉의 시작은 제임스의 독백으로 자신의 어릴적 기억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시작되는데, 작품중 유일한 대사인 제임스의 독백은 영국의 가수겸 배우인 데이빗보위가 맡았다. 데이빗 보위는 눈사람의 이미지를 좋아했었나? 1984년 개봉된 〈매와 눈사람〉(The Falcon and the Snowman)에서도 팻매스니그룹과 함께 영화음악 (OST)에도 참여를 했었기 때문이니 말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의 눈사람은 레이몬드의 〈눈사람〉과는 전혀 다른, 암호명으로 쓰이지만.

성탄절무렵의 제임스는 눈이 많이 쌓인 앞마당에서, 눈을 뭉쳐 창문으로 던지다가 어머니에게 혼이 난다. 다른방법으로 놀 궁리를 하다가 눈사람을 만들게 되고, 그날밤 왠일일지 잠을 이루지 못한다. 자신이 만든 눈사람에게 계속 관심이 가는 제임스. 정확하게 시계가 자정을 가르킬때, 눈사람은 움직이기 시작하고 제임스에게 인사를 한다. 제임스는 눈사람에게 자신의 방, 거실, 부엌, 부모님의 방 그리고 창고등을 보여주며 모든것이 신기하기만 한 눈사람에게 자신의 집을 소개한다. 앞마당의 오토바이를 몰고 숲속을 한바퀴 돌기도 하며.

이젠 눈사람이 자신의 마을을 소개할 차례. 제임스의 팔을 잡은 눈사람은 힘차게 도움박질을 하더니, 어느덧 하늘을 나르게되고, 다른 눈사람들과의 조우 와 고래와의 장난 등, 북극으로 가는길은 즐겁기만 하다. 오로라의 무지개빛에 휩싸인 눈사람들의 마을, 북극에 도착한 제임스는 산타도 만나고... 한바탕 즐겁게 춤을 춘 뒤 제임스는 눈사람의 도움으로 귀가한다. 눈사람과 아쉽게 작별인사를 하고 제임스는 잠을 청하게 되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현관밖으로 달려나가지만 남아있는것은 눈사람의 모자와 머플러 그리고 단추로 사용했던 석탄 3조각뿐. 하지만 제임스의 호주머니속엔 분명 어젯밤 산타로 부터 받은 머플러가 있다. 이것이 이 짧은 작품의 모든 줄거리다.

29분의 단편 애니메이션이지만 이 작품의 여운은 마음속에 오래 남는다. Walking in the Air는 변주의 형태로 작품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데, 그 외에도 담겨있는 하워드 블레이크의 배경음악은 하나의 캐롤로도 손색이 없다.

원작인 책도 애니메이션과 마찬가지로 한자의 글자도 없다고 하니 (책으로서의 눈사람은 여러가지 종류가 발간되었는데, 그중에선 글이 포함되어 있는종류도 있다.) 전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원작자 및 감독의 의도대로 읽혀지고 보여지는데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을테고, 때문에 전세계 어린이 및 어른들의 마음속에 그토록 오랫동안 자리잡을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Y2K가 4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밀레니엄이 오기전의 이번 마지막 성탄절에 우리의 마음속에 녹아버린 눈사람을 다시한번 만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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