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니 걱정, 붕괴 걱정에 잠 못드는 동해시 묵호동 언덕배기 달동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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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홍정진 팀장 제공

'빠직 빠직 뿌지직' 금방이라도 지붕이 주저앉을 것만 같다. 1m가 넘는 눈이 슬레이트 지붕을 짓누르고 있어서다. 방 안에는 전기장판에 의지한 한 할아버지가 초조한 표정으로 천장을 쳐다보고 있다. 몸이 불편한 듯 거동 조차 힘든 그는 축 져진 천장을 물끄러미 지켜볼 뿐, 어쩔 도리가 없다. 집 앞에는 웬만한 어른 가슴 높이 만큼 눈이 쌓여 지붕을 지지하거나 수리할 수 있는 자재 반입도 안되는 상황이다.

강원도 동해시 묵호동의 가파른 언덕에 자리한 홍모(94) 할아버지의 집은 14일 위태로운 모습으로 그렇게 눈 속에 고립돼 있었다. 때마침 '월드비전' 동해종합사회복지관 홍정진(43)운영지원팀장이 할아버지를 찾았다. 손에는 할아버지에게 드릴 도시락을 든 채다. 홍 팀장이 지붕에서 연신 뿜어져나오는 불길한 소리를 들었다. 홍 팀장은 "어르신, 옷가지를 문 앞에 두세요.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얼른 옷을 가지고 뛰어나가셔야 해요. 아셨죠?"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할아버지는 "알았다"고 하시더니 이내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 눈 속에서 뭐하러 왔어. 이럴 땐 나돌아다니지 마. 안와도 돼"라며 홍 팀장에게 되레 호통을 쳤다. 위험 속에 내동댕이쳐진 자신의 처지보다는 홍 팀장을 먼저 걱정하는 것이다. 눈 폭탄 속에서도 봄기운을 가득 담은 정(情)은 그렇게 묵호동 언덕배기를 감쌌다.

홍 팀장은 이 일대 혼자 사는 노인과 소년소녀가장 250세대에 무료 도시락을 배달하고 있다. 눈 폭탄에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해 고립된 어르신과 휴교령으로 급식을 못해 굶고 있을 아이들 생각에 그는 잰 발걸음을 옮겼다. 3~4일 분 반찬과 라면을 가방에 넣고 한 집 한 집 찾아다녔다. 그의 키는 178cm. 간선도로만 드문 드문 눈이 치워져 있을 뿐 그가 가는 골목길은 가슴높이까지 눈이 쌓인채 얼어가고 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을 정도로 비좁은 골목길의 눈은 마치 방어벽처럼 달동네를 감싸안아 마을을 도심 속 섬으로 만들었다. 홍 팀장 이외에는 이 곳을 찾는 사람도 없다. 동네 주민들도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마을엔 하얀 적막만 흐를 뿐이다. 홍 팀장은 손과 발로 눈을 밀치며 길을 내고 게걸음으로 골목을 헤쳐갔다. 겨우 집 앞에 도착해도 대문을 열 수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대문 꼭대기까지 쌓인 눈 때문이다. 손으로 또 치웠다. 홍 팀장은 "집에 눈을 치울 사람이 있으면 좋을텐데 전혀 손 쓸 수가 없는 상황이다. 붕괴위험이 심각하다고 판단되는 몇 집의 눈은 대충 치워줬는데, 혹시 사고라도 날까 너무 불안하다"고 말했다.

어르신들은 이런 홍 팀장이 안스럽기만하다. "늙은 노인네 먹이려고 여기까지 왔어?"라며 호통치는 분. 홍 팀장의 두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시는 분. 손으로 기어 마루까지 나와 손사래로 배웅하는 분. 펄쩍펄쩍 뛰며 반기는 아이들. 홍 팀장은 "우리 아버지·어머니, 내 자식 같은 사람들"이라며 이미 얼어버린 신발과 젖은 옷에 달라붙은 눈을 툭툭 털어냈다.

이지은기자 je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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