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마그리트 그림 보면 철학하고 싶어지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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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마그리트와 시뮬라크르
박정자 지음, 기파랑
256쪽, 1만6500원

르네 마그리트는 지식인과 대중이 동시에 열광하는 화가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인 수수께끼 같은 파이프 그림은 ‘해석의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미셸 푸코를 포함한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그의 그림을 ‘이해를 돕기 위한 예시’이자 철학적 영감의 원천으로 활용했다. 마그리트는 광고 등 대중문화의 영역에서도 널리 팔린다. 지금도 서울역 앞 서울스퀘어 빌딩을 장식하는 LED 조명 등에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중절모 신사’가 쓰였다.

 신간은 ‘마그리트로 철학하기’의 길라잡이와도 같다. 먼저 르네상스 이래 서구 미술사의 지배적 통념을 마그리트가 어떻게 깨부수나 들여다본다. 깨부순 자리에 푸코의 유사(類似)와 상사(相似) 개념을 대입한다. 모델과는 관계 없이 복제품끼리 닮아가며 반복하는 상사 개념은 시뮬라크르로 이어진다. 플라톤으로부터 비롯된 시뮬라크르는 들뢰즈에 의해 복권됐고 보드리야르에 이르러 현대의 지배적 현상(개념)으로 확립됐다. 이렇듯 2000년 서양철학사를 헤집으며 벨라스케즈·한스 홀바인·반 고흐 등을 논하는 밀도가 뻑뻑하다.

 마그리트를 즐긴다고 해서 섣불리 집었다가는 꽤나 지적인 고문에 시달릴 것이다. 그림을 화두로 현대 철학의 주요 테마와 씨름해보려는 이들에게 적당하다. 책 말미에 ‘문화광(門化光·광화문 한자를 현대식으로 읽었을 때)’ 현판 소동이 가짜의 시뮬라크르 시대를 보여준다는 통찰엔 고개가 끄덕여진다.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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