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삭하고 부드럽고 … 반죽은 거칠거칠해야 제맛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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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호 10면

내가 이런 글을 쓰니 명절 때 시댁에서 솜씨를 발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울산 출신인 시어머님 음식 솜씨가 워낙 뛰어나 생선과 해물은 물론 파전 등의 음식이 거의 달인의 경지다. 여기에 형님은 전남 해남 출신으로 어리굴젓 같은 고난도의 음식도 척척 해낸다. 큰시누이는 생크림케이크나 피칸파이 만들기를 예사로 안다. 이런 시댁에서 내가 뽐낼 수 있는 유일한 품목은 녹두빈대떡이다. 이건 내 솜씨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시어머님과 형님이 모두 녹두빈대떡을 해먹지 않는 남쪽 지방 출신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내가 결혼해서 녹두빈대떡을 시도하기 전까지는, 이 음식은 집에서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낯선 음식이었던 셈이다.

이영미의 제철 밥상 차리기 <46>명절 음식의 감초, 녹두 빈대떡

녹두빈대떡이나 만두 같은 음식이 중부 이북 지방의 음식이라는 것을, 나는 결혼 후에나 알았다. 시어머님이 하신 음식을 먹어보면, 밀가루를 이용한 파전이나 부추전 같은 것은 경남 지방의 것이 월등하게 뛰어나다. 그에 비해 녹두빈대떡은 아예 해먹는 법도 모르는 낯선 음식이라는 것이다. 떡만둣국·송편·녹두빈대떡 같은 것이 명절 음식이라는 것을 부산 출신들은 그저 학교에서 배우고, 시험 보기 위해서 외웠을 뿐이란다. 교육의 섬세한 지점에까지 얼마나 서울 중심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가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돈 없으면 대폿집에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라는 대중가요(한복남의 ‘빈대떡 신사’)가 나올 정도로 1950년대 빈대떡과 대포 한잔 마시는 선술집이 많이 늘어난 것도, 지역의 특성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녹두빈대떡은 황해도와 평안도 쪽으로 올라갈수록, 속을 적게 넣고 녹두 고유한 맛을 살리는 방식으로 부친다. 즉 서울과 경기도의 녹두빈대떡과 달리 평북 지방의 것은 아무것도 넣지 않은 채 오로지 녹두만 부치는 것이다. 이런 빈대떡은 그야말로 녹두 맛을 잘 알아야만 제 맛을 낼 수 있는 것이니, 평안도 사람들이야말로 녹두빈대떡의 고수라 할 만하다. 그런데 50년대에는 분단으로 인해 평안도의 월남민들이 서울에 갑자기 많아졌다. 재산도 별로 없이 내려온 월남민들이 별 밑천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장사가 바로 빈대떡 부치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음식은 ‘빈대떡이나’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값싸고 쉬운 음식은 아니다. 품도 많이 들고 맛있게 부치기 위해서 노하우도 꽤 필요하다. 예전에는 빈대떡을 하기 위한 첫 시작은 맷돌에 녹두를 가는 일부터였다. 마른 녹두를 매로 한 번 돌리면 두세 조각으로 쪼개지는데, 이것을 물에 불려 거피를 하는 것이다. 이제는 기계로 거피한 녹두를 팔기 때문에 맷돌질을 안 해도 되는데, 그래도 거피 녹두를 물을 불리면서 손으로 주무르고 여러 번 물을 헹구어 남은 껍질을 흘려 보내야 하니 만만한 일이 아니다. 껍질 없이 깨끗이 불린 녹두를 조리질해 돌을 골라내는 것이 그 다음 일이다. 잡곡은 완전히 석발이 되지 않은 상태로 팔리기 때문에, 귀찮다고 그냥 했다가는 돌이 씹히는 빈대떡을 만들기 십상이다.

녹두 가는 일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역시 맷돌에 돌리는 것인데, 믹서에 갈면서도 맷돌에 돌렸을 때 정도의 입자 크기를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손으로 만져보아 약간 거칠거칠할 정도로 갈아야 한다. 또 믹서가 아주 잘 돌아갈 정도로 물을 넣으면 반죽이 묽어져 부칠 수가 없으니 약간 뻑뻑한 정도로 물을 넣는 것도 중요하다. 시장에서 갈아 파는 것은, 농도는 그럭저럭 맞추어져 있으나 너무 곱게 갈려 있는 경우가 많다. 녹두를 너무 곱게 갈면, 녹두빈대떡 특유의 퍼석하게 부드러운 질감이 살지 않는다. 마찬가지 이유로, 불린 쌀을 조금 섞을 때에도 찹쌀이 아니라 멥쌀을 섞어야 한다. 녹두빈대떡의 맛은 바삭하면서 부드러운 맛이며, 찹쌀의 찐득하게 부드러운 맛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소는 돼지고기, 김치, 파, 숙주나물, 불린 다시마 등을 넣는데 고사리·도라지 같은 것도 있으면 좋다. 옛날 방식은 반죽을 한 국자 떠서 번철(한국식 프라이팬)에 펴놓고, 그 위에 길게 썬 김치와 파·다시마·고사리 등을 죽죽 늘어놓아 부치는 것이다. 소가 그리 많이 들어가지 않고 녹두 고유한 맛을 살리는 방법인데, 요즘은 소를 많이 고루 넣는 것을 좋아하는 추세이므로 모두 자잘하게 썰어 뒤섞어 골고루 펴놓는다. 단 소를 섞을 때에는 너무 치대어 만두소처럼 만들면 안 된다. 손가락으로 살살 뒤섞어 재료 고유의 맛을 살려야 한다.

부치는 것에서는 기름의 양과 온도가 중요하다. 밀가루 전에 비해 기름을 많이 둘러야 하고, 그 기름이 꽤 가열된 후에 반죽을 펴놓는다. 기름 위에 반죽을 놓을 때 마치 튀김 할 때처럼 기름 소리가 요란할 정도가 되어야 하고, 그래야 표면이 바삭해진다. 그 위에 소를 골고루 펴놓고 다시 반죽을 얇게 덮어 뒤집는다. 소와 반죽을 처음부터 뒤섞어 부치는 것보다는 따로 놓는 것이 맛도 모양도 훨씬 깨끗하다.

빈대떡이 속까지 충분하게 익기 위해서는 꽤 오래 가열해야 한다. 타지 않게 부치려면 처음 반죽 놓을 때보다는 낮은 온도에 기름도 적은 상태에서 익혀야 한다. 그래서 서양식 팬보다는 우리나라 번철이 훨씬 편하다. 번철은 중앙이 약간 낮아 기름을 부으면 가운데로 모인다. 거기에 반죽을 놓고 뒤집은 뒤 가장자리로 밀어놓으면 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익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처음 넣었던 과도한 기름이 상당히 빠져나오면서 맛이 깔끔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집에서 이런 번철까지 갖추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이제는 프라이팬에서 가스불과 기름 양을 계속 조절해가면서 부치는 수밖에 없다.

갓 부친 빈대떡은 어찌나 맛있는지. 바삭하고 고소한 표면에 녹두 향 그윽한 부드러운 속이 입에서 살살 녹는다. 하루 종일 기름과 씨름을 하고 나면 저녁에는 기름내 나는 음식이 꼴도 보기 싫어지니, 그러기 전에 가장 먼저 부친 빈대떡을 한두 장 맛있게 먹자. 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 내 손으로 만든 가장 맛있는 음식에 일단 내 입이 즐거워야 일할 맛도 나지 않겠는가.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
문 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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