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찌질남, 완소남 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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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호 05면

극단 현대극장의 ‘남자따위가 왜 필요해?’는 미국의 인기작가이자 감독인 리치 슈바트의 원작을 토대로 한 작품이다. ‘사소한 거짓말과 우연적 상황이 맞물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는 하루 동안의 요절복통 해프닝’이라는, 40여 개국에서 상연 중인 인기 연극 ‘라이어’의 구조를 그대로 따왔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우리나라에서 세계 초연되는 작품이다. 제목에서 느껴지듯 남녀관계에 있어 여자들이 바라는 바람직한 남성상에 대한 물음과 가까운 사이일수록 오히려 소통이 단절돼 버린 현대 사회의 가족·연인·부부간의 관계에 대해 뼈 있는 질문을 던진다.

연극 ‘남자따위가 왜 필요해?’, 27일~2월 13일 예술의전당

‘웨스트앤드 애비뉴 9572번지’라는 같은 주소를 쓰는 세 명의 주인공 찰리, 테리, 마르조리. 퇴짜맞는 게 전문인 ‘대표 찌질남’ 찰리가 어느 날 이웃집 테리의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가짜 남친이 되어주기로 하면서 모든 상황이 꼬이게 된다. 찰리가 연기해야 하는 테리의 남친 ‘조’에 대해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다 다르다. 테리의 엄마는 다정다감한 자신의 이상형을, 테리의 아빠는 마초 스타일인 자신의 친구를, 마르조리의 라이벌인 레즈비언 로라는 자신과 같은 동성애자의 모습을 찾는다. 그 모든 기대를 채워주기 위해 찰리와 주인공들은 모든 상황에 맞는 연기를 해야 하고, 결국 실제 상황과 진짜 자기 모습이 어떤 건지조차 헷갈리게 된다.

그렇게 나를 위한 관계인지, 관계를 위해 내가 있는 건지 혼란스러운 가운데 결국 ‘관계’로 정의되는 나. 관계 속에서만 존재감을 가지는 우리는 어쩌면 모두가 관계를 연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족과 이웃, 연인이라는 끈끈한 관계도 알고 보면 얼마나 피상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인지.

작품은 저마다 잘난 사람들의 입장을 보호해주기 위해 거짓 관계를 연기하던 찌질남 찰리가 예기치 않게 모두에게 사랑받는 매력남으로 둔갑하고 마는 아이러니로 귀결된다. 우연이나마 찌질남 찰리를 한순간에 매력남으로 변신시킨 관계의 비법은 뭘까?

테리의 엄마 게일이 수시로 거품 물고 토로하는 ‘모욕과 무시로 가득 찬 35년간의 결혼생활’로 상징되는, 아빠 밥이 추구하는 ‘마초적인 남성 대 순종적인 여성’의 관계가 아닌, 테리가 추구하는 ‘서로 배려하고 경청하고 존중하는 평등한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다정다감함이 그 열쇠일 것이다. ‘남자따위가 왜 필요해?’라는 제목처럼, 여자 위에 군림하는 남자는 더 이상 필요 없다. 세상에 그런 남자뿐이라면 차라리 여자를 사랑하는 게 낫겠다. 루저의 외모와 조건을 가졌더라도 여자를 존중하고 아껴주는 남자라면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여성상위시대, 남성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로 생존하기 위한 관계의 팁을 제시하는 여성중심적인 연극이다. 02- 762-6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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