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넘치는데 고민 없는 우리, 품위 있는 사회였으면 좋겠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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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금실(전 법무부 장관) 변호사는 “진보냐, 보수냐, 그런 좁은 틀로 예수를 다 설명할 수 없다. 예수는 전체다. 나는 그 입장에 공감한다”고 말했다. 김도훈 인턴기자

강금실(54) 변호사가 책을 냈다. 그런데 종교 관련 서적이다. 최근 출간된 가톨릭 성지순례기인 『오래된 영혼』(웅진지식하우스)이다. 노무현 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 등을 지내며 ‘진보적 여성 정치인’의 이미지가 강했던 그다. 24일 서울 강남역 근처의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사무실 벽면 책꽂이에는 『주역강의』 『종의 기원』 『우파니샤드』 『토머스 머튼의 영적 일기』 등 ‘다양한 그의 관심’이 꽂혀 있었다. 그는 “대학 다닐 때부터 목마름이 있었어요. 그건 ‘어떻게 해서 내가 살게 됐는가?’에 대한 물음이었죠. 대학 1, 2학년 때는 아예 종교학과로 전공을 바꿀까도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당시 통도사의 수행 프로그램도 참석하고, 신학 서적도 많이 읽었어요. 철학자 에리히 프롬의 책도 많이 봤습니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첫 여성 법무부 장관’으로만 알고 있었다. 종교적 지향이 강한 줄 몰랐다.

 “2003년이었다. 그때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미술관에서 그림 한 점을 봤다. 검은 나무들 사이에 한 남자가 엎드려 있는 그림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내 가슴에 ‘팍!’하고 강하고 깊게 꽂히더라. 어두컴컴한 톤이라 처음에는 무슨 그림인지 몰랐다. 나중에 보니 겟세마네 동산에서 엎드려 기도하는 예수님이셨다. 그 이듬해 저는 세례를 받았다.”

 - 그 그림이 왜 가슴에 꽂혔나.

 “한국에 돌아와서 성경에서 그 대목(마태오복음 26장)을 찾았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했다. ‘주여! 가능하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하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개인적으로 ‘가능하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하소서’란 대목이 와 닿더라. 어찌 보면 굉장히 약한 인간의 모습이 아닌가. 저는 그 말에 공감이 가더라.”

 -2008년 4월에 정치권에서 물러났고, 그 해 8월부터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어떻게 지내나.

 “변호사 일을 하며 바쁘게 지낸다. 변호사를 찾아오는 이들은 굉장히 아픈 사람들이다. 그게 경제적 삶이든, 가족 관계든, 정치적 삶이든 위기를 겪는 사람이 많이 온다. 변호사는 그들을 상대하는 일종의 컨설턴트다. 그렇게 아픈 사람들을 만나면서 오히려 많이 배운다. 그게 변호사란 직업의 좋은 점이다.”

 -당신에게 ‘정치’는 무엇이고, ‘종교’는 무엇인가.

 “아직 모르겠다. 아직은 더 익을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올해 1월1일 신년 미사에서 예수 탄생에 대한 미사강론을 들었다. 목자들의 방문을 받고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것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는 성경 구절이 있더라. 저도 아직 말을 아껴야 할 때다.”

 -책 서두에서 “내게서 바닥을 보는 듯한 한계를 느껴 정치권에서 회귀했다. 가장 하고 싶은 것이 ‘공부’였다”는 대목이 있다. 법무부 장관을 할 때도 그랬나.

 “법무부에 있을 때 절감한 게 있다. 바깥 사회에서 축적된 논의가 있을 때 그게 정책에 반영될 수 있다는 거다. 정부 부처 하나가 흐름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사회적인 높이가 올라왔을 때 그게 정치 아젠다가 돼서 갈 수 있다는 거다. 검찰 개혁과 여러 과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사회 전체의 높이가 쌓여야 한다.”

 -정치권은 어떤가.

  “정치권도 그렇다. 정당을 중심으로 연구와 논의가 축적되고, 쌓여야만 전문화한 토론 정치가 나올 수 있다. 아직 우리 사회는 거기까지 가진 못하고 있다. 저도 고민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정치적 담론의 힘이 너무 세다고 본다. 많은 사람이 정치적 이슈, 정치적 갈등에는 관심이 많다. 그러나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얘기가 없다.”

 -종교를 통해 그런 바닥을 넘어설 수도 있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내면의 바닥까지 해지고 해지다가 신앙을 선택하는 게 아닌가 싶다. 종교는 아주 근본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내면만 다루는 게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에 대한 성찰이다. 거기서부터 제 세계관을 정립하고픈 생각이 있는 거다. 그런데 그 과정이 아직도 시작 단계다. 저는 우리 사회가 품위가 있었으면 좋겠다.”

 -품위라면.

 “품위는 ‘격(格)’이다. ‘격’이라는 건 그 사회가 어제를 살고, 오늘을 살고, 더 나은 내일로 나가기 위해서 합의가 되는 생각들이다. 가령 아이들은 이렇게 길러야 한다, 공동체는 이래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 가치를 바탕으로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는 거다. 그게 없으면 얼씨구 절씨구가 된다. 이번 성지순례에서 이탈리아 수비아코에 있는 성 베네딕도 수도원을 방문했다. 거기서 베네딕도 성인의 삶을 들여다봤다. 그는 서구사회에서 최초로 수도원 문화를 일군 사람이다. 수도 규칙도 만들었다. 그걸 만든 과정이 인상 깊었다. 베네딕도 성인은 새 판을 짠 셈이었다.”

 -새 판을 짜는 힘은 어디서 오나.

 “결국 새로운 시스템이다. 그런데 그 시스템이 새롭지만 새롭지 않다는 거다. 이게 중요하다. 당시 서구에는 수도원이 없었다. 그러나 동구에는 수도원이 있었다. 베네딕도 성인도 그랬다. 과거에 있었던 것을 종합하면서 새로운 길을 낸 것이었다. 갑자기 새 길이 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생명력이 있는 거다.”

 -성지순례를 다녀왔더니 무엇이 달라졌나.

 “전에도 커피를 즐겼다. 그냥 커피를 마셨다. 그러다 커피 농장에 가봤다. 거기서 커피에 관해 많은 걸 보게 됐다. 커피의 역사와 커피 수확에 필요한 많은 사람의 노고를 알게 됐다. 농장에 다녀온 뒤에는 커피 마실 때 달라진다. 커피 안에 녹아있는 역사와 사람들의 노고를 함께 마시게 된다. 성지순례도 그랬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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