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진 스트라이커 역할 좋았어 … 구자철, 조광래 마음 훔쳤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뒤쪽으로 침투하는 이청용을 쳐다보지 않고 감각적으로 오른발로 각도 크게 틀어 패스.

# 장면 1  전반 18분. 조용형이 오른쪽 측면에서 구자철에게 패스를 건넸다. 구자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른발로 방향을 크게 틀어 페널티박스 안으로 볼을 연결했다. 이청용이 공간으로 침투하고 있었다. 볼을 잡은 이청용은 상대 알스나니 골키퍼와 1대1로 맞서는 기회를 잡았다. 구자철의 시야와 판단력이 돋보였다. 하지만 이청용의 슈팅은 골키퍼에게 막혔다.

이청용에게 적절히 연결될 수 있는 강도로 패스.

# 장면 2  전반 38분. 상대 진영 왼쪽에서 볼을 잡은 구자철이 포백 뒷공간으로 쇄도하는 이청용에게 침투 패스를 건넸다. 수비라인은 통과하되 이청용이 잡을 수 있게 연결한 패스 강도가 절묘했다. 오프사이드 트랩이 무너지자 당황한 상대 골키퍼는 이청용을 태클로 넘어뜨렸다. 주심은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구자철은 소속팀 제주에서 세트피스 전담 키커다.

# 장면 3  전반 42분. 상대 진영 중앙에서 구자철이 볼을 잡자 알 자지라 수비라인이 뒤로 물러섰다. 침투 패스를 주지 않겠다는 계산이었다. 공간이 생기자 구자철은 지체 없이 강력한 오른발 중거리 슛을 날렸다. 골대 왼쪽으로 살짝 벗어났지만 벤치에 있던 조광래 감독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45분이면 충분했다. 구자철(22·제주)이 조광래 축구대표팀 감독의 마음을 훔쳤다.

 조 감독은 5일(한국시간)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모하메드 빈 자예드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현지 프로팀 알자지라와의 친선전에서 구자철을 처진 스트라이커로 전반 45분 동안 테스트했다. 조 감독은 “구자철이 들어가면 미드필드 장악력이 높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구자철은 소속팀 제주와 아시안게임 대표팀에서 주로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다.

아랍에미리트(UAE) 클럽팀 알자지라와의 평가전에서 드리블하고 있는 구자철. 그는 처진 스트라이커로 45분간 뛰었다. [아부다비=임현동 기자]

 조 감독의 예상은 적중했다. 최전방 스트라이커 지동원(20·전남) 아래 위치한 구자철은 미드필더 출신답게 안정적인 볼 컨트롤에 이은 정확한 패스로 대표팀 공격을 매끄럽게 만들었다. 구자철 덕분에 지난 시리아전과 비교할 때 공격진에서 패스가 상대 수비에게 끊기는 상황이 현저히 줄었다. 볼 소유 시간이 는 조광래팀은 쉽게 경기를 지배하며 2-0으로 승리했다.

 상대 골대 앞으로 한 계단 전진 배치된 덕분인지 지난 시즌 K-리그 도움왕(12도움)의 패스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전반에만 이청용에게 세 차례나 상대 골키퍼와 1대1로 맞서는 기회를 제공했다. 수비 뒷공간을 향해 뛰는 이청용의 발 밑에 자로 잰 듯한 땅볼 패스를 보냈다.

 경기 후 조 감독은 “박주영의 부상으로 그동안 처진 스트라이커 포지션에 고민이 많았는데 자철이가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줬다. 아시안컵 첫 상대인 바레인전(11일)에 선발로 내보내도 될 것 같다”고 만족했다. 이날 구자철과 찰떡 호흡을 과시한 이청용은 “자철이가 들어오면 창의적인 플레이가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하지만 구자철은 “아직 멀었다.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다”며 겸손해했다. 그는 90분을 뛰어도 지치는 기색이 없고, 기술까지 겸비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대런 플레처를 롤 모델로 삼고 있다. 빛나지는 않아도, 어떤 팀에서든 꼭 필요한 존재가 되겠다는 각오다.

 구자철은 지난해 말 ‘여대생들이 뽑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고 싶은 선수 1위’에 오를 정도의 꽃미남이자 훈련장에서는 나머지 훈련을 자청하는 성실맨이다. 축구인 중에는 공을 물 흐르듯 편하게 차는 스타일과 성실한 자세가 어린 시절의 박지성, 이영표와 비슷하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많다.

글=아부다비=김종력 기자
사진=임현동 기자

◆처진 스트라이커=최전방 공격수 뒤에 머물며 상대 미드필더와 수비진 사이에서 활동한다. 최전방 선수에게 슛 기회가 될 만한 패스를 찔러주는 역할을 하며 때로는 직접 슈팅해 골을 넣는다. 공격형 미드필더와 역할이 비슷하지만 수비 부담은 작다. 섀도 스트라이커(shadow striker)라고도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