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고장나도 나는 갈 거야, 내가 못 가면 엄마가 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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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아빠,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20일 경북 김천소년교도소 대강당에서 소년 재소자들이 뮤지컬을 통해 자기 고백의 시간을 가졌다. 이들은 지난 4개월간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대본에 담았다. 부모님 앞에서 처음 공연한 소년들은 눈물을 쏟기도 했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제공]


아들의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떨렸다. “나는 갈 거다. 기차가 고장 나서 멈췄다고 나까지 멈춰 있을 순 없다. 내가 못 가면 우리 엄마는 분명히 운다. 평생 울지도 모른다.” 무대 위에서 정일(가명·18)이가 무릎을 꿇었다. 대사가 이어질수록 어깨의 들썩임이 커졌다. 정일이의 눈물이 무대 바닥을 적셨다. 객석에 앉은 엄마의 어깨도 가늘게 떨렸다. 남편의 죽음, 아들의 비행과 사고, 재판, 교도소 수감까지 지난날의 사건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취중에 친구를 때려 살인죄로 교도소 수감 생활을 한 지 1년째였다. 그때부터 말을 잊고 살던 아들이었다. 엄마는 작은 목소리로 “사랑한다, 내 아들”을 되뇌었다.

 무대 위에 오른 재소자 아이들 18명은 정일이의 뒤를 이어 고해성사를 시작했다. “못난 아들을 포기하지 않고 매번 찾아와 사람 되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고 말했다. 그러자 객석에서 “나도 사랑한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러 번 리허설을 했지만 눈물을 흘린 것은 처음이었다. 감독도, 배우도, 관객도 함께 울었다.

 20일 경북 김천소년교도소 대강당에선 독특한 뮤지컬이 열렸다. 재소자들이 직접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대본으로 엮었다. 기차를 타고 꿈을 찾아나선 아이들이 기차가 고장 나 좌절하게 되고, 걸어서라도 목적지에 가겠다고 다짐한다는 내용이다. 이 공연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주관하는 ‘교정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진흥원은 2006년부터 교정시설 20곳에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지원해 왔다.

 이 공연 준비는 지난 8월에 시작됐다. 전문 연극배우와 스태프들이 투입됐다. 매주 2시간씩 아이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첫 만남은 서먹했다. 아이들은 남들 앞에서 노래하거나 춤춰 본 적이 없었다.

 선생님들은 “꿈은 무엇인지, 가고 싶은 곳은 어디인지” 등을 물으며 상상력 수업에 집중했다. 저마다 ‘바다, 해돋이, 집, 고향’을 말했다. 특수절도죄로 2년째 수감 생활 중인 재용(가명·21)이는 “가족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사업 실패로 술에 의지해 살던 아버지, 생계를 잇기 위해 밖으로 돌아야 했던 어머니. 재용이의 가족은 사진 찍을 여유가 없었다. 소년들의 이런 꿈들은 그대로 대본에 담겼다. 후반부 독백 대사는 각자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었다.

 제법 고난도 안무까지 소화하게 됐을 때 아이들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서로 적대적이기 십상인 교도소에서 출연자 18명은 우정을 키웠다. 어두웠던 얼굴도 많이 밝아졌다.

 이날 공연 중에 아이들은 웃고 있었다. 김종석 예술감독은 인사말에서 “용기 있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내는 것을 보고, 우리 연극인들이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과연 이들처럼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연극을 다시 배웠다”고 고백했다.

 공연이 끝나고 부모님들의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객석 맨 뒷자리에서 조용히 재용이를 지켜보던 아버지는 “출소하면 가족사진부터 찍어야겠다”고 했다. “본인이 가족을 챙기지 못해 아들이 엇나갔다며 미안하다”고도 했다.

 규정상 공연 후 부모와의 만남은 없었다. 재소자들은 곧장 격리돼 높은 담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무대의 감동이 가시지 않은 채 공연 의상에서 푸른색 수의로 갈아입었다. 부모님은 멀리서 아들에게 손만 흔들어야 했다. 대신 아들의 땀과 눈물에 젖은 공연 의상을 받아 들었다. 옷 위엔 아이들이 직접 정한 공연 제목 ‘우리, 다시!’가 크게 쓰여 있었다.

김천=김효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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