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Novel] 이문열 연재소설 ‘리투아니아 여인’ 4-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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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백두리 baekduri@naver.com

“따뜻하게 데워져 있는 집안 공기, 하루의 노고를 일시에 씻어버릴 위로와 미소, 당신만을 위한 식단과 거기에 이어진 보살핌, 그리고 당신이 만족하게 잠들 수 있을 때까지의 끊임 없는 봉사와 배려. 요컨대 그런 것들이 내게는 전혀 없다는 것이지요? 그저 인색한 대역처럼 최소한의 협업(協業)으로 가정이란 무대를 채울 뿐인 내가 못마땅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는 그녀의 말투에서 묻어나는 어떤 느낌이 갑자기 내 악의의 강도를 높였다. 마침 비워진 술병을 소리 나게 탁자에 놓으면서 내가 먼저 언성을 높였다.

 “아니, 그보다 더 근본적인 거야. 지금 이 순간도 당신은 나와 부부로서 살아가는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한 배우로서 연기하고 있는 거라고. 당신이 말하고 있는 상대는 남편인 내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관객을 향해서라고. 이 아파트는 세 시간 전에 우리가 막 내리고 온 무대처럼 위치만 달라진 또 다른 무대이고···.”

 “제가 너무 수식적(修飾的)인 대사를 썼나요? 그러면서도 너무 절제된 어조와 정적인 제스처로 연기했나요? 차라리 울고불고 하며 퍼대는 게 더 살아있는 대사가 되었을까요? 당신에게 덤벼들어 물어뜯고 할퀴어야 당신이 말한 그 삶에 다가드는 연기였을까요?”

 그녀도 무엇 때문인지 평소 같지 않게 달아올라 격앙된 목소리로 내 말을 받았다. 그녀도 언제부터인가 내가 속으로 키워오던 불만을 느껴왔던 것 같고, 그래서 한 번쯤은 그런 분출을 예비해 오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지나친 확전이 슬그머니 걱정되기는 했으나, 아직은 물러서고 싶지 않아 그대로 버텼다.

 “아니, 내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당신의 연기가 아니라,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사고의 습성이야. 모든 것을 연극으로 환치해 버리는 사고의 습성···. 나는 지금 연극을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 부부로서의 우리 생활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거라고. 우리가 함께 가정을 이루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와 방식에 대해 따져보고 있는 중이라고.”

 그러자 그녀가 잠시 아득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어 놀라움과 두려움이 어리기 시작하더니 마지막에는 나도 알아볼 만큼 서러움을 드러냈다. 눈물을 보이지 않고도 그만큼 서러움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에 가슴 서늘한 감동이 일었으나, 그것도 연기라고 생각하자 감동은 다시 반감으로 변했다. 못 본 척 그녀의 그런 눈길을 피해 다시 술병을 따고 있는데, 그녀가 발딱 몸을 일으켰다.

 잠시 뒤에 아내가 장식장에서 찾아온 것은 내가 즐기지 않아 몇 년째 그 선반에 무슨 소품처럼 얹혀 있던 코냑 한 병이었다. 그 코냑 병 곁에 있던 작은 수정 잔 하나를 함께 들고 온 그녀는 스낵 하나 집지 않고 잇따라 몇 잔이나 코냑을 따라 마셨다. 어찌 보면 폭발 직전의 어떤 절박감을 드러내는 행동일 수도 있었지만, 내게는 그것도 연기 같아 아무런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애써 무시한다는 기분도 없이 그녀가 마시는 대로 버려두었다.

 한동안 야릇한 고요 속에 둘 모두 열심히 술만 들이켰다. 얼마나 지났을까, 거실의 벽시계가 열한 번이거나 열두 번 길게 시간을 알리는 기계음을 내고 조용해지자, 갑자기 고개를 돌린 아내가 나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알겠네요. 정작 당신이 내게 무슨 소리를 하고 있고 하려고 하는지. 하지만 내가 전혀 못 알아들을 말은 아니네요. 만난 지 5년도 안 돼 당신에게서 다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지만요.”

 그녀가 그러면서 아무런 자제 없이 코를 쿨쩍였다. 그 때문에 그녀의 취기가 과장되어선지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줄어들며 나를 긴장하게 했다. 그녀의 말을 끊지 않고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당신이 말하는 아내의 삶이란 배려 깊은 하녀와 양순한 창녀의 역을 합친 그 무엇이겠지요. 현모양처란 고색창연한 개념을 다 채우자면 모성본능에 충실한 어미 노릇까지 보태야 하나? 그래서 질척하고 헐렁헐렁해진 삶에 퍼질러 앉아 함께 녹아내리고 닳아가며 늙으라는 거겠지. 하지만 싫어. 나는 두번 다시 그 억지스러운 역할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싶지 않아. 한 번으로 충분해. 그리고 그 한 번은 이미 십 년 전에 지나왔어. 사람들은 말하지. 내 첫 번째 결혼을 재벌 이세의 미색 취향과 속된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만난 것쯤으로. 그렇지만 아니야. 나는 일시적인 무대를 떠나 장구한 삶 속에 자리 잡는다는 느낌으로 그 청혼을 받아들였고, 그쪽도 처음에는 틀림없이 아내로 나를 맞아들였어. 현모양처가 되어줄 배우자로. 그런데 그 현모양처가 문제였어. 그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갈 때 나는 문제 없이 학업도 그와 함께할 것이라고 믿었어. 처음 한 해 알뜰한 주부로 살아갈 때도, 나는 그것이 그쪽의 유학생활 적응을 위해 내가 당연히 양보해야 할 유예라고 보았지. 그런데 아니었어요. 내게 요구되는 역할은 상대의 섹스 욕구와 가사를 함께 감당하는 심성 좋은 하녀였고,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우리 파경은 시작되었어요. 나도 학부에 등록하려고 하자 그쪽에서 펄쩍 뛰듯 놀라며 말렸고, 두 번 세 번 거듭 요구하자 마침내는 아물 길 없는 불화로 이어졌지요. 거기다가 불임이 또 다른 구실이 되어 이혼을 하고 돌아서면서 나는 비로소 그렇게 함부로 내 무대를 팽개치고 떠난 것을 후회하게 되었어요. 버림받은 그 도시에 그대로 남아 삼 년이나 연극을 공부한 것도 그 뼈저린 후회가 큰 힘이 되었을 거예요. 그리고 돌아와 다시 무대에 서게 됐는데, 당신을 만났지요.

 당신은 전혀 그 고색창연한 현모양처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어요. 내가 선택한 무대의 좋은 배역 또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배역만 골라 맡겨줄 좋은 연출로만 보았죠. 그런데 아니었군요. 나는 또 무엇인가를 단단히 잘못 보았고요···.”

 거기까지 듣고 나자 어지간히 취해가던 나도 어디선가 넓은 유리창이 요란하게 부서져 흘러내리는 것 같은 환청과 함께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크게 낭패한 심정이 되어 우물우물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도 일은 이미 엎지른 물이 되어 되돌리기 어려워 보였다. 그저 그녀가 빨리 술기운에 져 잠들거나, 아니면 술기운을 이겨내고 격앙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게 고작이었다. 다행히도 아내는 그로부터 오래잖아 말을 끊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날갯죽지에 고개를 파묻은 새처럼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

 낭패감으로 드러났던 그날 밤의 불길한 예감은 이튿날부터 그 기미를 드러냈다. 아내의 말수가 적어지고, 부부로서 함께하던 삶에서 겉돌기 시작했다. 행선지를 모르는 외출이 잦아지고, 내가 파악할 수 없는 외부 체류가 늘어났다. 빡빡한 출연으로 자신을 혹사하다가, 때로는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취해서 돌아오는 일마저 생겼다.

 그제야 나는 우리가 부부로서 출연한 무대에서 새로운 막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기분으로 긴장했다. 삶은 틀림없이 우리가 고쳐 쓸 수 없는 연극의 한 토막이고, 우리는 어떤 역할이 맡겨져도 마다할 수 없는 광대들이란 잔인한 자각이 일며 주체할 수 없는 환멸 속에 삶은 다시 철저하게 연극으로 환치되었다. 그리고 나도 한 시, 한 치도 어김없는 배우로 돌아갔다. 내가 떨어진 상황과 아퀴가 맞는 역할을 상정하며, 때로는 아내가 겉돌며 생긴 빈자리에 대역을 채우려는 듯 새로운 사랑을 시도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내가 그 요란한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부부라는 관계를 벗어던지지 않고는 끝내 내 요구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었던 것처럼 나 또한 그 수렁 같은 결혼생활을 유지하면서 삶을 내가 바란 대로 되돌려 놓을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던 그 수렁은 어느 날 생각보다 일찍 그리고 간명하게 다가왔다. 아내가 내게 파국을 선언하고 짐을 싸 나간 지 닷새 만에 아내와 어떤 극작가의 스캔들이 보도되면서 내 추인 절차 없이 우리 결혼생활은 법적으로 종결되었다.

 한편으로는 후련했지만 한편으로는 상처와 후회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아내는 내 생애에서 단 한 번 있었던 결혼의 배우자였고, 그녀와 함께한 오 년은 내 삶이 원숙을 지향하는 중년의 고비였다. 우리 결혼생활은 불행하게 끝났지만, 그래도 가슴속에 남은 아내의 빈자리는 한동안 나를 헤매게 했다. 그게 몇 달 젊어서도 보이지 않았던 비틀거림으로 나를 사랑하던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이대로 삶이 끝나서는 안 된다. 무엇인가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까닭 모를 허무감과 체념 속으로 까마득하게 자맥질하면서도 의식 한 구석에서 끊임없이 그렇게 소리치던 삶의 의지가 어느 날 다시 나를 일으켜 세웠다. 이른바 자유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앞두고 한창 나라가 출렁거리던 그해 나는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로 유학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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