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분양 시대 `사내판촉`의 그림자

조인스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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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하반기 입주를 앞둔 수도권 북부권 A아파트. 지난 5월 이 일대 중개업소에 전체 가구수의 10%에 달하는 300여 가구가 한꺼번에 매물로 나왔다. 시공사인 B건설 직원들이 갖고 있던 물량이다. 회사는 2008년 초 분양된 이 아파트가 잘 팔리지 않자 분양률을 높이기 위해 계약금을 지원해주고 직원들 명의로 300여 가구를 계약했다. 입주가 다가오자 이른바 ‘사내 판촉’ 물량을 팔기 위해 일찌감치 매물을 내놓은 것. 주택시장이 워낙 가라앉은데다 일대에 입주가 몰려있어 잘 팔리지 않는다.

건설사들이 직원들 명의로 계약한 사내 판촉 물량이 주택시장에 또다른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입주 시점에 많은 물량이 쏟아져 나와 가격 하락을 재촉하는 것이다. 한국건설산업전략연구소 김선덕 소장은 "직원들에게 아파트를 판 건설사들도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겠느냐"면서도 “아무튼 마이너스 프리미엄이 속출하는 상황에 더 부담을 주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최근 입주가 시작된 수도권 서북부의 C아파트는 4700여 가구 중 1000가구가 이 회사 직원 물량으로 알려져 있다. 화정동 G공인 최모 사장은 “가뜩이나 시장 상황이 좋지 않은데 이런 물건까지 쏟아지니 정작 일반 계약자들이 거래하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전했다.

명의 빌려준 직원 퇴사 못하는 경우도

익명을 요구한 이 아파트 시공사 임원은 “대단지인 데다 초기 계약률이 낮아 부서별로 몇 가구씩 할당했었다”며 “직원 명의 뿐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 이름으로 계약한 경우도 많아 정확한 집계도 어렵다”고 설명했다. 건설업체에서 직원에게 사내 판촉을 하는 경우 전제는 환매조건이다. 회사가 계약금과 중도금 대출 이자를 지원해 주고 입주시 분양가에 웃돈이 붙으면 직원이 시세 차익을 갖고 분양가보다 떨어지면 회사가 책임지고 회수한다는 것이다. 경기가 좋을 때는 ‘회사도 좋고 직원도 좋은 일’이 되지만 요즘 같은 시장 침체기엔 회사·직원 뿐 아니라 시장 전체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용인시 동천동 H공인 김모 사장은 “회사가 빨리 판촉 물량을 털기 위해 가격을 많이 낮추는 경우도 많아 시세 하락의 큰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사내 판촉 아파트가 팔리지 않자 부작용도 따르고 있다. 워크아웃 중인 B건설 직원들은 사표를 내고 싶어도 못 낸다. 명의만 빌려달라는 요청에 계약한 A아파트 때문이다. 당초 입주 때 전매키로 했으나 주택시장 침체로 분양권은 팔리지 않고 회사 경영사정은 악화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됐다. 더 큰 문제는 중도금 대출이다. 익명을 요구한 이 회사 직원은 “6회분 중 마지막 대출 이자가 미납됐다며 은행에서 독촉장을 보냈다”며 “신용불량이 될 것 같아 개인 돈으로 이자를 낸 직원들도 있다”고 말했다. 5월 입주를 시작한 남양주의 D아파트엔 시공사인 E건설 직원이 20여명이 살고 있다. 사내판촉 물량을 떠안은 직원들은 거래도 안되고 전세 놓기도 여의치 않자 어쩔 수 없이 입주한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회사 직원은 “회사 측에서 팔아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회사가 워크아웃에 들어가 포기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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