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리처드 홀브룩 전 미국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 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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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한 직후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전문가 기고에서 “당선인은 어떻게든 가장 똑똑한 사람들을 뽑아 내각을 꾸려야 한다”고 조언하면서 두 사람을 공개 추천했다. 경제 분야에선 하버드대 총장 출신의 래리 서머스, 외교분야에선 리처드 홀브룩(사진) 전 유엔 주재 대사였다. 뉴스위크는 “민주당에서 그 분야는 단연코 홀브룩의 독무대다. 생각이 유연하고 모든 쟁점을 이해한다. 각국 지도자들과 안면이 있고, 외교관으로서 중재자의 능력이 입증됐다”고 평가했다. 오바마는 취임 뒤 서머스를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 의장에, 홀브룩을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특사에 기용했다.

 그런 홀브룩 특사가 13일(현지시간) 워싱턴DC 조지워싱턴 대학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69세. 10일 국무부에서 회의 도중 대동맥 파열로 쓰러진 뒤 급히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병원을 직접 찾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오늘은 나에게, 미 국무부에, 미국에 슬픈 날”이라고 애도했다. 클린턴은 “미국은 가장 치열했던 용사와 가장 헌신적이었던 공직자를 잃었다”며 “아시아에서 유럽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는 그의 공헌으로 인해 평화로운 미래를 가질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도 홀브룩의 임종 직전 가족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미국 외교정책에서 우뚝 솟은 인물로, 전 세계의 존경을 받는 지치지 않는 공직자였다”고 칭송했다.

1977년 주한 미 지상군 철수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방한한 홀브룩 차관보(오른쪽)가 박동진 외무장관과 악수하고 있다. [중앙포토]

 홀브룩은 국무부에서 아시아와 유럽 지역을 담당하는 차관보를 각각 지내는 등 장관을 뺀 거의 모든 고위직을 맡으며 외교 업적을 거둔 유일한 인물이었다. 유태계 출신으로 브라운 대학을 졸업한 후 1962년 베트남에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한 그는 77년 지미 카터 행정부 시절 35세 나이로 미국의 대(對) 아시아 외교정책을 총괄하는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자리에 올랐다. 이때 그는 한국의 10·26, 12·12 사건과 마주쳤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암살 당한 10·26 사건 직후 홀브룩은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에서 진행되는 정치일정에 깊이 관여했다. 이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주도의 12·12 쿠데타가 발생하자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에게 신군부의 권력강화 움직임을 견제하는 입장을 취하도록 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그는 다시 차관보 자리를 맡았다. 이번에 유럽이었다. 95년 능력을 십분 발휘해 옛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의 분쟁 당사자들을 오하이오주 데이턴에 모두 불러모아 발칸반도의 평화를 이끌어냈다. 3년간 20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고 23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을 종식하는 ‘데이턴 평화협정’을 성사시킨 것이다. 이때부터 홀브룩은 ‘분쟁해결 전문가’로서의 명성을 날렸다.

 1990년대 말 유엔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뒤 그는 내심 국무장관직을 희망했다. 2008년 대선 당시 힐러리 클린턴을 민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클린턴은 오바마에게 밀렸고, 그의 꿈도 함께 추락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장관직 대신 아프간·파키스탄 문제의 해결이라는 중책을 그에게 맡겼다.

 홀브룩은 오바마 정부에서 일하기 직전인 2008년 4월~11월 8개월 동안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로 활약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외교적 경험을 바탕으로 전세계의 현안들이 지닌 의미를 깊이 있게 분석하는 글로 독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공교롭게도 첫 칼럼이 그가 나중에 중책을 맡게 된 아프간 전쟁의 관한 통찰이었다.

 그 해 4월 중앙일보를 방문한 자리에서 홀브룩은 “72년 처음 한국을 방문할 당시엔 군사정부의 통치 아래 통행 금지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오늘날 한국은 전 세계에서 인력 자원과 국가 정신을 기반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둔 본보기 국가가 됐다” 고 말했다. 홀브룩은 저돌적이었고, 때로는 불협화음도 만들었지만 평화를 사랑했던 인물이었다. 중앙일보에 깨알 같은 친필로 적어 보낸 그의 이력에는 “8번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다”는 구절이 있었다.

워싱턴=김정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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