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예산권을 정부에 넘겨줄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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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내년도 예산안을 날치기 처리한 이후 정치권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 국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어처구니가 없다. 이러고도 국민의 대표기관이라 할 수 있는지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헌법으로 보장된 예산 편성권을 아예 포기하는 듯한 언행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13일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는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을 여의도 당사로 불러 템플스테이 예산, 재일민단 지원사업 등 당의 공약사업을 예산안에 반영하지 않았다고 질타했다고 한다. 그러나 윤 장관은 예산과 재정이 지켜야 할 기준이나 원칙을 당(黨)도 존중해줘야 한다며 반박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예산안 심사를 더 해야 한다는 야당의 요구를 묵살하며 강행 처리한 집권당의 대표가 그 안에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인가.

 예산안 처리 시한은 헌법에 규정된 사항이다. 연례행사처럼 그 시한을 넘겨온 것은 반드시 고쳐야 할 폐습(弊習)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산안의 내용이다. 설령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국민의 뜻을 제대로 반영해 낭비적 요소를 줄이고, 우리 사회의 어두운 부분에 따뜻한 온기를 전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예산권이 국회에 있는 것은 그런 이유다.

 야당이 반대하는데도 집권당이 강행 처리 방침을 정할 때는 응당 예산안을 충분히 검토하고 조정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라고 국민은 믿었다. 그런데 심사 과정부터 엉터리였다. 예결위 계수조정소위는 6일간 감액(減額) 심사를 한 게 전부라고 한다. 증액(增額) 부분은 국회 예결위가 아니라 재정부가 칼자루를 쥐었다고 한다. 그것도 예산안 처리 하루 전날 밤 결정해 당에서는 그 내용도 모른 채 무작정 표결을 강행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어떤 예산안을 통과시키는 것인지도 모른 채 몸싸움까지 벌여놓고 뒤늦게 그 책임을 정부에 묻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예산 심의의 책임이 정부에 있다는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 더욱 낯 뜨거운 일은 이렇게 예산안을 방치해놓은 상태에서도 여야 정당과 의원들은 무려 1200건에 이르는 지역구 예산 증액 민원, 소위 ‘쪽지’를 재정부에 전달했다고 한다. 재정부는 그중 9할은 불가(不可) 판정을 내렸다고 한다. 그 통에 한나라당의 공약사업도 날아간 것이다.

 물론 헌법 57조는 정부 제출 예산안을 증액하거나 신규 편성할 때는 정부 동의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심사권은 어디까지나 국회에 있다. 연평도 포격이 아니라 난리가 나도 예산심사권을 정부에 넘겨줄 수는 없다. 갑자기 돌발사태에 대응하는 사안도 아니고 연례 예산을 편성하는 일을 놓고 그 흔한 당정회의에서는 무엇을 했는지 궁금하다. 결국 부실 심사를 자인하는 꼴이요, 예산안 강행처리의 명분마저 잃어버린 꼴이다. 그 책임을 정부에 돌릴 일이 아니다. 예산안을 회기 내 처리한 것은 그대로 평가할 만하지만 그렇다고 내용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졸속 처리한 책임이 면탈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