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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성 의약품 자립은 ‘의약 주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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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박방주
과학전문기자

“일본 정부는 암 진단과 치료용 방사성 의약품의 국내 생산을 경제성이 없다고 보고 1980년대에 대부분 수입으로 전환했어요. 몹시 후회할 짓을 한 거지요.”

 일본방사성동위원소협회의 이도 다쓰오 이사가 최근 한국에서 열린 ‘원자력 의학포럼’에 와서 발표한 내용이다. ‘방사성 의약품 생산 주권’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한 자리였다. 우리나라도 국내 수요의 90% 이상을 수입해 그 금액이 연간 300여 억원에 이른다. 이도 이사는 “세계적으로 방사성 의약품 공급 불안이 지속되지만 생산시설과 전문인력이 부족해 일본처럼 발만 동동 구르는 나라가 많다”고 전했다. 방사성 의약품은 간·심장·폐 등 장기의 기능을 검사하고, 암 진단·치료 등에 널리 쓰인다. 한마디로 방사성 동위원소를 활용해 만든 의약품으로, 암환자의 ‘생명줄’ 같은 존재다. 공급이 달리면 암환자들이 제때 적절한 비용으로 치료를 받기가 힘들어진다.

 일본이 요즘 고민하는 것도 그것이다. 투자한 만큼 이익이 당장 나오지 않는다고 20여 년 전에 자국 내 생산기반을 허물었지만 ‘의약 안보’ 차원에서 적정량을 꾸준히 생산해 왔다면 지금처럼 당황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다. 세계 의료용 방사성 동위원소의 수급 불안은 2년 전 캐나다의 원자로가 고장 나면서 촉발됐다. 세계 수요의 80%를 캐나다와 네덜란드의 원자로 두 기가 공급해 왔는데 그중 하나가 멈춰버린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 두 기의 원자로가 가동 50년이 넘었다는 데 있다. 네덜란드의 나머지 한 기마저 언제 고장 날지 모른다. 만일 그렇게 되면 암환자들에겐 재앙이나 다름없다.

 이런 징후는 이미 시장에 반영되고 있다. 방사성 동위원소 값이 크게 뛰었다. 이를 사가려면 노후 원자로의 보수비를 내라고 요구할 조짐마저 있다. 생산시설이 부족하거나 없는 나라들은 그런 막무가내 요청이 와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

 우리 정부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부산시 기장군에 2015년 완공 목표로 방사성 동위원소 생산용 원자로를 건설하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통과 가능성 반반의 예비타당성 조사 단계라 제때 들어설지는 두고 봐야 한다. 다만 일본의 뼈아픈 전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일이다.

박방주 과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