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패니메이션과 아니메가 갖는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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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일본 애니메이션을 가리켜 재패니메이션(Japanimation), 혹은 아니메(Anime) 라고 부른다. 이처럼 두 단어는 이미 우리사회에선 일본 애니메이션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똑같은 말처럼 쓰이고 있다. 그러나 과연 '재패니메이션'과 '아니메'가 갖고 있는 원 뜻과 그 의미가 같은 것일까?
일본 애니메이션을 하나하나 살펴보기에 앞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가리켜 부르는 '재패니메이션'과 '아니메'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속뜻과 그러한 단어들이 생겨난 배경을 되 짚어보자.

'재패니메이션'이란 말은 지금부터 약 25년전, 미국에서 처음 생겨 난 말이다. 지금은 미국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일본산 애미메이션을 일컬을 때 흔히 통용되는 말로 쓰였다. 그러나 그 '재패니메이션'이란 말이 생겨나게 된 배경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다.

25년전 미국에서 처음으로 일본산 애니메이션이 소개 된 건 공중파 방송을 통해서였다. 이들 방송국은 일본애니메이션을 TV용 어린이프로로 방영시키기 위해 우선 전체적인 스토리를 권선징악으로 끌고 가야 했다. 잔혹한 장면은 전부 삭제시키고, 대사는 알기 쉽게 번역하였으며,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정의감이 넘치는 좋은 사람으로 그려야 했다. 뿐만 아니라 대하드라마와 같은 장대한 오리지널 스토리까지 단순구조로 완결되는 이야기로 바꾸어놓았다. 이처럼 방송국들은 착한 자가 악당들을 물리친다는 단순한 스토리의 재구성을 위해 원판의 일본 애니메이션을 갈기갈기 찢어 재편집을 했던 것이다. '재패니메이션'이란 말은 바로 이때 생겨난 말로, 미국 TV의 어린이용 프로로 재편집 된 아주 다른 일본산 애니메이션을 가리키는 것이다.

실제로 1974년 일본에서 방영되었던 오리지널 〈우주전함 야마토〉는 미국 TV의 '재패니메이션'으로서 방영되기 위해 전혀 다른 내용의 애니메이션으로 탈바꿈하였음을 볼 수 있다.

서기 2199년. 지구는 가미라스 행성의 공격을 받게된다. 이 외계행성의 침략에 의해 지구는 인류멸망까지 1년이라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스칸달 행성으로부터 방사능을 제거할 장치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지구는 전함 야마토를 개조 14만8천광년 떨어진 이스칸달 행성을 향해 출발한다. 그러나 이스칸달 행성도 자신의 별의 극심한 환경오염으로 인해 하는 수 없이 지구를 침략, 이주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 전쟁에서 주인공 고다이 스스무(古代進)는 사랑하는 형을 잃고, 목숨을 건 숨가쁜 전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그가 이끄는 우주전함 야마토는 가미라스 행성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멸망의 운명을 감수하며 전쟁의 폐허로 변해버린 이스칸달 행성과 다른 행성을 침략해서라도 살아 남으려 했던 가미라스 행성의 최후를 망연자실 바라보고 있는 주인공 고다이 스스무의 눈에는 허무감이 깃든다.

이러한 줄거리의 〈우주전함 야마토〉는 미국에선 〈스타 블레이저스(Star Brazers)〉란 타이틀로 방영된다. 주인공의 이름이 바뀐 것은 물론이고 설정도 〈스타트렉〉과 같이 한 편마다 이야기가 완결되는 형태로 변형되었다. 다시 말해 우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순찰하는 스타 블레이저스에게 '이번엔 이러한 악당이 도전해 왔다!' 라는 식의 이야기로 탈바꿈 된 것이다.
전 26회분의 TV 방영분 〈우주전함 야마토〉는 이처럼 필름이 갈기갈기 조각나 재편집 되어 원판과는 전혀 다른, 영상의 일부분들만이 연결 된 아주 다른 이야기의 애니메이션이 되어버린 것이다. 바로 이것이 미국에서 일컬었던 '재패니메이션'의 정체라 할 수 있다.

이것에 반해 '아니메'란 일본산 애니메이션을 별다른 수정 없이 그대로 영어화(英語化)한 것을 일컫는 말이다. 등장인물의 이름과 스토리도 오리지널 일본판에 충실하며, 헐리우드에 뒤지지 않는 속도감 있는 액션 또한 그대로 전달한다. '재패니메이션'을 보고 자라난 세대는 이러한 오리지널 영상을 처음 접하면서 그들이 보고 자랐던 '재패니메이션'의 정체가 가짜였음을 알게 되기에 이른다. '아니메'란 말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 된 그야말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가리키는 말이라 할 수 있겠다.

현재 미국의 대부분의 대학에는 '아니메 서클'이 존재한다. 이들은 매주 일본산 애니메이션의 감상회를 열고 지금까지 자신들이 보아왔던 '재패니메이션'과 오리지널 '아니메'가 어떻게 다른가를 비교, 연구하기도 한다.
1977년 LA에서 설립 된 '지오가니제이션'이란 이름의 클럽은 일본애니메이션의 붐을 일게 한 대표적인 클럽으로, 일본 TV에서 녹화한 테입을 클럽 멤버들끼리 서로 복사, 교환해 가는 형식으로 일본만화를 보급해 왔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 된 '아니메' 감상회가 현재 미국의 대부분의 대학에 존재하게 된 것이고, 이것이 일본애니메이션의 정체를 정확히 알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일본 애니메이션은 헐리우드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 힘을 발휘하며 미국은 물론 세계 여러나라에서 그 지지기반을 다지고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개방이 허용되고 있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일본 애니메이션은 많은 매니아들의 지지를 얻으며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실정이다. 이러한 때 '재패니메이션'이나 '아니메'란 단어의 무분별한 혼용은 한번쯤 되 집어봐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한다.

-고기홍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연극영화학과 졸업
일본대학 대학원 예술학연구과 영상예술 전공 석사
〈멀티미디어가 가져오는 영상문화의 변화〉 연구
현재, 한일영화전문웹진 '인사이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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