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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라인, 우리가 만들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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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정욱
워싱턴 특파원

북한이 연평도를 공격한 지 닷새 만에 중국은 6자회담 수석대표 회동을 제안하고 나섰다. 그것도 마치 이 세상에서 중국이 한반도 평화를 가장 희원(希願)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안 그래도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확실한 답변을 끌어내기 위해 합심해서 압박 국면을 유지하고 있던 한국과 국제사회 입장에선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다. 한국전 이후 처음으로 남한 영토가 공격당했는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아니 황급히 놀란 모습으로 회담에 응하라고? 중국은 어떻게 이런 제의를 할 수 있었을까.

 정치적 입장을 다 버리고도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들이 한국민이 느끼는 정서를 전혀 공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한국민들의 분노와 슬픔에 공감했다면 중국 외교부 대변인의 입에서 한날 한시에 “사상자 발생에 애도를 표시한다”는 말과 “남북한이 먼저 상대방이 포격했다고 주장하는 상황”이란 말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한반도 평화와 우리가 바라는 한반도 평화는 그 절박성과 순수성에서 큰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이제 알아야 한다.

 미국은 이번에도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함을 서해 지역에 급파하는 등 믿음직한 동맹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렇다면 미국은 우리와 똑같은 정서를 함께 나눠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미 국무부 필립 크롤리 공보 차관보는 북한의 연평도 공격을 ‘일회성 도발’로 평가했다. 우리 국민들이 느끼는 불안과 비교해보면 온도차가 있는 발언이다. 연평도 공격 직전 북한은 우라늄 농축시설을 공개했다. 오바마 정부의 한 당국자는 “북한이 플루토늄에 이어 우라늄 핵 기술까지 발전시키도록 내버려 두느니 이쯤에서 대화에 나서는 게 낫다는 의견이 제기되기 시작했다”며 “연평도 사건만 없었더라면 6자회담이 앞당겨질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엔 핵 비확산이 더욱 중요한 문제다. 당분간 한국의 입장을 존중하겠지만, 연평도 사건의 여진이 조속히 가라앉길 바라는 입장은 명확하다.

 한승주 전 주미대사는 대사 시절을 회고한 글에서 “미국의 대북정책은 강경한 듯하지만 북한이 합의를 위반해도 속수무책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을 뿐”이라며 “북한의 선 넘기가 두려운 미국은 북한에 대해 레드라인(redline·금지선)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가 없다”고 분석했다. 워싱턴 한반도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이 같은 시각에 동의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이것만큼은 지켜낸다는 레드라인이 있었던가. 이 선을 넘어서면 어떤 상황논리도 용납하지 않고 총력을 다해 응징할 거라는, 그래서 상대방을 선 근처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레드라인이 있었던가. 북한의 연평도 공격은 김정은 체제 출범을 앞두고 벌인 레드라인 테스트였다. 그들이 이번 도발에서도 한국의 레드라인을 확인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테스트는 계속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대다수 국민이 동의하는 확고한 대북 레드라인을 만들어야 한다. 그 바탕에서만이 단호함도, 유연함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는 조지 워싱턴함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김정욱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