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교사의 기부터 살려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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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지난 9월 독일의 한 행정법원이 의미 있는 판결을 내렸다. 니더작센주(州)의 김나지움(대학진학을 목표로 하는 중등교육과정)에 다니는 한 학생과 부모가 제기한 이의신청을 기각한 것이다. 이 학생은 프랑스어 시험에서 수·우·미·양·가 중 ‘양’에 해당하는 성적(4.41)을 받았다. 김나지움에서는 주요 과목에서 두 개의 ‘가’를 받으면 유급당하며, 이 학생은 수학에서 ‘가’를 받은 상태였다. 따라서 간신히 유급만은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사들은 회의를 열어 학생의 프랑스어 성적을 ‘가’로 떨어뜨렸다. 유급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유는? “학과목에 대한 기본 지식이 부족해 상급학년 공부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며, 학생의 성적이나 학습태도가 학년 초보다 학년 말에 더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졸지에 유급당한 학생과 부모의 이의신청에 대해 법원은 “교사는 산술적 시험 결과에 따라 학생을 평가해야 할 의무가 없으며, 학습·능력 발달사항을 고려한 교육적 책임과 전체적인 평가를 통해 예외적으로 시험 결과를 달리 평가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교사의 교육적 재량권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만약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다면 어땠을까. 구태여 법원까지 갈 것도 없이, 일부러 성적을 깎아 유급시킴으로써 말썽을 자초할 교사는 찾아보기조차 힘들 것이다. 독일 교사와 한국 교사 사이에는 권위와 재량권, 신뢰도 측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교육적’일까. 나는 독일 교사들이 당장의 반발을 무릅쓰더라도 해당 학생의 장래에 도움이 되는, 교육의 본질에 부합하는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교사들은 피곤하다. 정권마다 서로 다른 방법을 ‘창안’해 교사를 몰아칠 생각부터 한다. 물론 교사평가를 마다하는 전교조의 조직이기주의, ‘오장풍’과 성추행 교사로 대표되는 몇몇 교사들의 일탈로 안 그래도 ‘철밥통’이라는 시샘을 품고 있던 일반 국민의 시선이 더욱 따가워진 탓도 크다. 최근에는 경기도·서울에서 학생인권조례, 체벌금지 같은 정책이 시행되면서 교사들의 사기와 재량권이 한층 쪼그라들었다.

 지난달 서울시교육청이 체벌금지에 따른 대책이라며 내놓은 ‘문제행동 유형별 학생생활지도 매뉴얼’은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몇몇 비현실적 조항 때문에 비웃음을 사고 있다. 지각한 학생에게 ‘일과를 시작하기 전 노래부르기, 참선, 요가를 시킨다’든가, ‘학생이 음주나 흡연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음주 또는 흡연 측정기를 사용하여 확인하고 지도한다’든가, ‘염색과 퍼머는 성장기인 청소년의 두피 건강을 해치므로 금지하는 이유를 설명하여 이해시킨다’ 같은 조항들이다. KBS 2TV의 ‘개그콘서트’에서는 “지각한 학생에게 노래시키면 ‘수퍼스타 K’처럼 ‘지각스타 K’가 나오는 거냐. 만약 머리 염색한 학생이 술 먹고 지각하고 선생님에게 대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비꼬기도 했다.

 ‘꿈의 학교, 행복한 교육’을 지향한다는 전문가들이 내놓은 정책이 왜 조롱거리로까지 전락했을까. 나는 ‘권리’와 ‘의무’ 사이의 균형감각이 결여된 탓이라고 본다. 서울시교육청의 새 교육지표가 ‘소통하고 배려하는 창의적 민주시민 육성’이라는데, 민주시민이라면 당연히 권리와 함께 의무도 져야 하는 것 아닌가. 온통 학생의 권리만 부추기니까 청소년인권운동단체라는 곳에서 “청소년의 성(性)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연애 탄압’ 학칙을 폐지하라”는 웃지 못할 요구까지 하는 것 아닐까.

 진심으로 학생들의 장래를 걱정하고 애쓰는 교사가 대다수다. 그들의 권위와 사기를 되살릴 정책을 속히 마련하라. 학생에게는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의 엄중함도 가르쳐야 한다. 지금처럼 교사가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별다른 생활지도 수단조차 없는 상황에선 제자에게 머리채를 잡히는 황당한 사태가 속출할 수밖에 없다. 독일의 선생님들에게 부여된 권위를 우리라고 누리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