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15) 건빵 봉지 속 별사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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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이 터진 직후인 1950년 7월 마을의 소년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국군장병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부족한 물자로 고전을 면치 못했던 국군에게는 밀가루로 만들어 휴대가 간편했던 건빵이 아주 요긴한 대용식이었다. 작가 박도씨가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자료를 정리해 펴낸 『한국전쟁 Ⅱ』(눈빛)에 실린 사진이다.


전선의 고지에는 식품이 제때 공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평시가 아니라 한창 전투가 불붙고 있는 때에는 병사들이 끼니를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적의 공세가 치열하거나 전선 상황이 매우 험악해져 고지 위로 식량을 나를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간식거리로 지급된 건빵이 매우 유용해진다. 끼니를 때울 음식이 없을 때 식사 대용으로 이 건빵을 먹으면서 적과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운반이 편하고 한꺼번에 많은 양을 실어 나를 수 있는 건빵은 보급 우선순위에서 항상 수위를 차지했다. 전선에서 허기를 참아가며 악전고투(惡戰苦鬪)해야 하는 국군들의 사정을 감안할 때 충분한 먹을거리를 공급하는 것 못지않게 대용식인 건빵을 제대로 생산해 보급하는 일도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변변한 설비를 갖추지 못했고, 밀가루 또한 풍족하지 않았던 당시의 대한민국에서 건빵을 대량으로 생산해 비축하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나의 전임자인 이종찬 육군참모총장 때는 건빵이 소량으로만 생산됐다. 6·25전쟁이 터진 뒤에도 국군에게 건빵은 지급 됐지만 양이 부족했고, 품질 또한 별로 좋지 않았다.

 건빵은 일제 강점기 때에도 생산을 했다. 그 시절에 건빵 공장을 운영한 경험이 있던 사람으로는 동립산업 함창희 사장이 있었다. 나는 우연하게 함 사장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미군이 대한민국에 들여오는 밀가루를 받아다가 대구에서 건빵을 만들었다. 나중에 서울의 영등포로 와서 큰 공장을 짓고 건빵을 대량으로 생산한 분이었다.

 나는 그를 통해 국군에 공급하는 건빵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시스템을 갖출 수 있었다. 소량으로 조금씩 나오던 건빵이 서울의 영등포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전선과 후방의 각 부대에 보내는 양이 많이 증가했다. 평소에 소비할 수 있는 양을 제외한 나머지 분량은 전투에 대비한 물자로 비축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당시에는 단맛을 내는 감미(甘味) 식품이 매우 부족했다. 중공군에게 서울을 내줬다가 다시 수복한 뒤 북진을 시작할 무렵 서울 만리동에 있던 국군 1사단 CP에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방문했을 때 장군은 내게 “한국군 급양 상태가 어떤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앞에서 소개한 내용이다.

 그때 내가 맥아더 장군에게 요구했던 것이 감미 식품이었다. 쌀밥에 된장과 고추장으로 버무린 야채나 고기는 부족하나마 먹을 수 있었지만, 전선의 장병에게 단맛이 나는 감미 식품은 절대 부족한 상태였다. 설탕을 제대로 생산해 낼 수 없었던 당시의 대한민국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요즘 군부대에 지급되는 건빵과 별사탕.

 건빵에 단맛이 나는 별사탕을 집어넣는 일은 제법 괜찮은 생각이었다. 정확하게 언제 건빵에 별사탕을 함께 넣기 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본에서도 건빵봉지에 별사탕을 함께 넣는다. 나는 건빵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체제를 갖추면서 별사탕도 함께 대량 생산토록 했다. 건빵을 먹는 방법을 보면 고참과 신참이 확연히 다르다. 고지에서 전투가 벌어질 때 허기에 몰려 있더라도 고참은 건빵을 한두 개씩만 먹는다. 그러나 신참은 허겁지겁 건빵을 먹다가 급기야 물을 찾게 마련이고, 고지를 내려가 물을 먹으려다가 적의 총탄에 쉽사리 죽거나 다친다.

 그러나 별사탕을 집어넣으면 그런 위험을 줄일 수 있다. 단맛이 나는 별사탕이 침샘을 계속 자극하기 때문에 밀가루로 만든 건빵을 먹으면서도 물을 급히 찾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단맛이 나는 식품이 절대 부족했던 상황이라서 건빵 한 봉지에 10여 개가 들어가 있던 별사탕은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아울러 전투 때 물이 적어도 건빵을 먹을 수 있다는 이유로 별사탕은 국군 장병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나도 사무실에서 내게 지급되는 건빵의 봉지를 열어 별사탕만 빼서 먹은 기억이 지금까지 생생하다.

 전선은 두 가지다. 보이는 전선과 보이지 않는 전선이다. 총칼을 들고 적과 직접 부딪쳐 싸우는 전선은 분명하게 우리의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그 전선의 뒤를 받치는 길면서도 매우 복잡한 선이 있다. 후방의 보급선이다.

 싸움은 눈에 보이는 전선에 나선 전투원들이 행한다. 그러나 그 싸움 못지않게 후방에서 전방으로 물자와 무기를 실어 나르는 작업 또한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만큼 중요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또 다른 전투인 셈이다. 후방의 물자와 무기 등을 전방으로 보내지 못하면 그 싸움의 승패는 불을 보듯 뻔하다.

 모든 것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던 신생 대한민국은 출범 두 돌 뒤 김일성의 남침으로 전화(戰火)에 휩싸였고, 잿더미와 다를 게 없던 상황에서 계속 북한군과 중공군을 맞아 싸워야 했다. 다행히 이 땅에 진주해 온 미군으로부터 모든 것을 빌려 쓰면서 간신히 적을 막아내고 있던 상황이었다.

 뭔가 부족하면 대한민국 육군의 책임자였던 나는 미군을 찾아가곤 했다. 그들은 어려운 대한민국의 사정을 듣고 곧바로 대량의 지원에 나서곤 했다. 한국과 미국의 협조 관계는 매우 훌륭했고 지원 규모 또한 대단했다. 그러나 그들만을 바라보면서 계속 손을 벌릴 수만은 없었다. 미국은 인색하지 않게 선뜻 모든 분야의 지원을 해줬지만 언제까지나 그들의 지원에만 기댈 수는 없었던 것이다.

 우리 나름대로 준비를 계속해야 했다. 피복과 건빵을 비롯해 당장 전투에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고 만들어 내는 일이 필요했다. 절대적인 물자 부족으로 모든 생산이 쉽지는 않았지만 조금씩이나마 물자를 확보하면서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체득해야 했다.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라도 줄기차게 펼쳐 가면서 미래를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했던 것이다.

 준비하는 사람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모든 것이 부족한 대한민국이었지만, 몸을 추슬러 물자 생산에 나서는 한편으로 현대적인 공업 시설을 배우고 익히면서 미군의 지원이 끊기거나 적어질 때를 대비해야 했다. 그것은 또 다른 전쟁이었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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