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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의 매화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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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매화를 만나러 전라선 열차에 오른다. 천리 길 아득해도 도착은 삽시간이다. 옛 그림에 그려진 '심매행(尋梅行)'은 느려터진 미학이다. 견마잡이를 앞세워 떡 하니 나귀에 올라탄 선비는 사방 진풍경을 다 챙길 요량이다. 게다가 술동이를 멘 하인이 뒤따르니 선비의 꽃구경은 필경 갈지자가 되리라. 이에 비해 철마를 타고 달리는 한일자 남행길은 살풍경하다. 매화에 허기진 마음이 채신머리없이 급행을 재촉한다. 하늘은 짙푸른데 섬진강은 서편제 가락처럼 흘러간다. 강가에 우거진 대숲이 바람에 일렁이는가 싶더니 우르르 달려드는 매화 향기. 코를 냅다 벌름거리며 들이마신다. 그러다 금세 겸연쩍어진다. 이건 아니다 싶은 것이다. 이런 조급함으로 문향(聞香)이 되겠는가.

문득 퇴계 선생의 매화 사랑 앞에 부끄러워진다. 스스로 털어놓기를 '혹애한다' 하였으니 선생이 읊조린 매화음(梅花吟)이 100수가 넘어도 놀랄 일은 아니다. 그 시들이 하나같이 선생의 성품인 양 원만한데다 삿됨이 없다. 꽃잎이 아래로 드리운 수양매를 보고 지은 시는 이렇다. '한 송이가 등돌려도 의심스런 일이거늘/어쩌자 드레드레 거꾸로만 피었는고/이러니 내 어쩌랴, 꽃 아래 와 섰나니/고개 들어야 송이송이 맘을 보여 주는구나'(손종섭 번역). 선생은 앵돌아진 여인의 마음을 타박하지 않는다. 먼저 다가가 살며시 다독인다. 모든 목숨붙이를 연민의 눈으로 본 선생의 호생지덕(好生之德)이 이 시에도 살아있다. 선생에게는 가까이 두고 어루만진 매화분이 있었다. 어쩌다 거처가 탁해지기라도 하면 매화분을 먼저 옮겨 씻기는가 하면 신병이 깊어지자 각방을 썼다는 일화도 있다. 모두 선생의 개결한 성정을 일러주는 사례이겠지만, 그 너머 또 다른 선생의 진정이 숨어 있을 것으로 믿는 사람도 있다. 바로 단양군수 시절에 만난 두향 얘기다.

관기였던 두향은 선생을 사모하여 가까이 모시길 자청했다. 처신이 풀 먹인 안동포처럼 빳빳한 어른인지라 두향의 애간장은 녹았을 것이다. 마침내 선생의 마음을 얻은 것은 조선 천지를 뒤져 기품 넘치는 매화 한 그루를 찾아낸 뒤였다. 두향은 그 매화를 선생에게 바쳤고, 선생은 단양 시절 동안 동헌에 심어놓고 애완했다. 물론 두향에게도 곁을 주었다고 한다. 두향의 매화는 선생이 새 임지로 떠나면서 도산으로 옮겨져 명맥을 이었다. 단양에 홀로 남았던 두향은 수년 뒤 선생의 부음을 듣고 자진했다. 죽음에 얽힌 설이 분분하지만 나는 앉은 채로 숨을 딱 멈춰버렸다는 두향이 가장 그답다고 여긴다.

두향의 묘는 지금 단양의 구담봉 맞은편 산자락에 있다. 그 묘가 충주댐 건설로 수몰될 뻔한 적이 있었다. 퇴계 후손이자 국학자인 고 이가원 선생이 생전에 두향 묘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그분이 해준 말씀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수몰을 앞두고 고심하던 어느 날, 그분 꿈속에 두향이 나타났다. 두향은 "나를 그대로 두시오. 물에 잠겨서라도 이곳에 있겠소"라고 했다는 것이다. 곡절 끝에 지금 자리로 이장되긴 했으나 두향의 일편단심은 꿈속에서도 단호했다. 퇴계 선생이 임종을 앞두고 남긴 말은 알다시피 "저 매화에 물 줘라"이다. 나는 그 말에서 선생의 심중에 남은 두향의 야윈 모습을 본다.

지난해 가을 나는 매화 전문가에게서 운 좋게도 도산 매화의 지손(支孫)을 몇 주 분양받았다. 가지도 줄기도 꽃받침도 모두 푸른 녹악매다. 집 담장 밑에 고이 심어 모셨다. 내년부터는 남행열차에 성급히 몸을 싣지 않아도 되리라. 느긋해진 마음으로 꽃이 피면 꽃 아래서 매화음(梅花飮)을 펼쳐도 좋겠다. 흥이 오르면 내 좋아하는 매화 시구를 읊어 보기로 작정해 둔다. 퇴계 선생과 두향이 명계에서나마 웃어주시면 좋겠다. '내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前身應是明月 幾生修到梅花)'.

우찬규 학고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