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우경화 바람' 또 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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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키히토 일왕이 7일 도쿄 궁에서 말레이시아 국왕을 영접하기 위해 서있다. 앞쪽에 뒷머리가 보이는 사람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도쿄 AP=연합]

일본의 역사교과서 검정이 진행 중인 가운데 주관 부처인 문부과학성의 정무관(차관급)이 '근린제국조항'을 공개 비판해 파문이 일고 있다. 근린제국조항은 역사 교과서의 근.현대사 기술은 이웃 아시아 국가들의 입장을 배려해야 한다고 규정한 검정 기준이다. 다케베 쓰토무(武部勤) 자민당 간사장은 5일 홋카이도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일본은 천황의 나라"라고 말했다. 태평양 전쟁 이전의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뜻으로 비춰졌다.

또 자민당이 헌법개정안에서 정교 분리의 원칙을 완화, 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를 공식화할 수 있는 조항 신설을 검토하는 등 일본 사회 전반의 우경화 바람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근린조항이 자학사관 조장"=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정무관은 6일 도쿄의 한 강연회에서 "근린제국조항 때문에 예전보다 더 철저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의한 자학(自虐)사관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1982년 교과서 파동 때 마련된 근린제국조항은 문부성이 교과서의 역사왜곡이나 편향된 기술을 출판사 측에 수정토록 지시하는 근거로 활용해 왔다.

시모무라 정무관의 발언은 현재 막바지 작업이 진행 중인 2006년 판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검정에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검정 대상 중에는 2001년 역사왜곡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던 우익단체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개정판도 포함돼 있다. 검정 결과는 다음달 초 나올 예정이다.

시모무라 정무관은 이어 "내년부터 사용할 중학교 교과서는 올 7~8월에 채택된다"며 "실제 현장에서는 편향적인 채택이 이뤄져 왔으나 이번엔 반드시 정상적으로 채택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익단체가 발간한 교과서의 채택률을 높여야 한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야스쿠니 참배 합법화"=마이니치(每日)신문은 6일 "자민당 신헌법기초위원회가 헌법 개정안 초안에서 '사회적 의례'와 '습속(習俗)적 행사'에 관한 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일정한 종교활동을 허용하는 내용을 담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정치와 종교 분리를 명시한 헌법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봉쇄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현행 헌법 제20조 3항에는 "국가 및 국가기관은 종교교육과 기타 어떤 종교적 활동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돼 있다. 자민당은 이 조항을 "국가와 지자체의 종교적 활동이 특정종교 지원 목적과 효과가 없으면 사회의례와 습속행사의 범위 내에서 허용된다"는 쪽으로 개정한다는 방침이다. 허용대상으로는 진혼제, 참배료 지출, 순직 공무원의 장례에 대한 지출 등이 검토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총리가 본인의 직함으로 서명하고 국가예산으로 참배료를 지불하는 등의 공식 참배도 위헌 논란 없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연립여당인 공명당과 야당의 반발로 실현 가능성은 미지수다. 개헌을 위해서는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이 필요하나 자민당 단독으론 이에 못 미친다. 일본에선 일제의 군국주의 도구로 활용된 국가 신도(神道)에 대한 반성으로 정교 분리 원칙을 엄수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도쿄=예영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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