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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언어교육' 해야 할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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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수석편집위원인 프랜시스 케언크로스가 '거리의 소멸(Death of Distance)'이란 책을 쓴 것은 1997년이었다. 정보통신 혁명에 따라 지리적 격차가 사라진다는 개념은 당시만 해도 참신한 발상이었다. 하지만 7년여 만에 벌써 진부한 개념이 됐다.

서울에 사는 아이들은 인터넷에서 만난 도쿄(東京)나 뉴욕.파리의 아이들과 서로 편을 갈라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즐기고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 자유롭게 어울리고 있는 그들에게 지리적 거리나 국경은 이미 무의미해졌다. 디지털 혁명이 가져온 놀라운 변화다. 일본의 경제평론가 오마에 겐이치(大前硏一)는 정보기술(IT) 혁명을 15~16세기 신대륙의 발견에 비견한다. 또 다른 신대륙이 나타났지만 보이지 않는 점이 그때와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신대륙의 등장으로 재미를 보고 있는 나라가 인도다. 미국에서 신용카드 회사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면 십중팔구 방갈로르나 뭄바이에 있는 인도인이 받는다. 국제통화료가 필요없는 온라인 네트워크가 아니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대졸 출신 인도인에게 미국 중서부 표준 억양을 한 달 정도 집중훈련시키면 미국인들도 속아넘어갈 정도가 된다.

GE, 씨티그룹, 아멕스, 허니웰, 스프린트, AOL 등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이 앞다퉈 인도로 콜센터를 옮겼다. 미국 내 콜센터 직원 임금의 15분의 1만 주면 되는 데다 이직률은 6분의 1에 불과하다. 친절하기 때문에 고객만족도는 오히려 높다. 현재 인도 내 425개의 콜센터에서 16만명이 일하고 있다. 올해 50억달러인 시장규모가 2008년에는 170억달러로 늘어나고 종사자 수는 2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지피족(Zippies)'이란 신조어까지 생겼다. 정보통신 기술과 영어구사 능력으로 무장한 젊은 인도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 다국적 기업들의 글로벌 아웃소싱(역외 외주용역)이 러시를 이루면서 "이러다 미국에는 피자 배달원밖에 안 남겠다"는 농담 섞인 우려도 나오고 있다.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안전벨트를 단단히 조이지 않으면 당신도 지피족에게 일자리를 빼앗길지 모른다"고 미국인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일자리 유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글로벌 아웃소싱이 세계 경제의 파이를 키워 결국 미 경제에 보탬이 될 거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지난주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한국에서 글로벌 인재를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보도했다. 문제점 중 하나로 든 것이 영어구사 능력이다. 인터넷으로 거리의 장벽은 해소됐지만 영어가 자유롭지 않으면 의사소통의 장벽은 그대로 남는다. 인도인이 각광받는 결정적 이유 가운데 하나도 영어 때문이다. 글로벌 경쟁시대를 맞아 국내 기업들의 해외 진출을 위해서도 그렇고, 외국 기업의 국내 유치를 위해서도 제대로 된 영어구사 능력은 필수적이다. 토플이나 토익 점수 위주의 영어교육으로는 한계가 있다. 요즘 각 대학이 영어강의 비중을 늘린다고 하지만 평소 수강생이 몰리던 과목도 영어강의로 바꾸면 수강생 수가 확 주는 것이 현실이다.

초등학교부터 한국어와 영어의 이중언어교육을 검토할 때가 됐다. 학부모들의 영어교육 열기를 감안하면 수요자 입장에서는 못할 것도 없다. 우선 영어 수업시간만이라도 오직 영어만 쓰도록 하고, 교사의 수준과 원어민 교사 확보율을 감안해 중.고교의 과목별 영어 강의 비중을 점차 늘려가는 방안을 적극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다음 세대의 글로벌 경쟁력을 생각한다면 더 늦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배명복 국제문제담당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