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mily/건강] 만사가 귀찮고 울적해지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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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인기 여배우의 자살이 가져온 사회적 충격이 크다. 자살은 이제 더이상 남의 얘기가 아닌 우리 삶의 보편적 행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2003년 우리나라 자살 인구는 1만1000여명. 하루 평균 30명꼴이다. 인구 10만명당 자살자는 24명이나 돼 전년대비 4.9명 증가했다. 20~30대의 경우엔 자살이 사망원인 1위다. 자살의 배후에는 우울증이 있다. 주위에서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치료를 받게 한다면 막을 수 있는 질환인 것이다.

◆ 우울감과 우울증은 다르다=자살의 가장 흔한 원인은 우울증이다. 자살을 시도한 사람의 70%는 우울증 환자이며, 이 중 15%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우울감은 슬프고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정. 하지만 상황과 무관하게 현재 자신의 모습과 미래상, 자신이 처한 입장 등을 모두 비관적으로 보고 자책하고 절망한다면 이는 치료가 필요한 병적 심리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M씨(39.남)가 대표적인 예. 주변에서 명의로 인정받던 그는 자살 한 두 달 전부터 매사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환자 상태가 안 좋으면 '내가 치료를 잘못했다'거나, 환자가 인사차 방문해도 '합병증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비합리적인 걱정과 자책감에 시달린 것. 그는 동료 의사로부터 심한 우울증이니 입원 치료를 받으라는 말을 들었지만 '나는 안 되는 인간이다'란 절망감에 빠져 자살을 선택했다.

우울증과 우울감을 판별하는 방법은 남의 눈을 통해 자신을 객관화하는 것이다. 서울 백병원 정신과 우종민 교수는 "우울하다면 다른 사람에게 스트레스 상황을 설명하고 자신의 행동과 생각이 지나치지 않은지 물어보라"고 권한다. 비슷한 상황에서 남들보다 사태를 더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정서적 우울감이 아닌 우울증이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다.

◆ 주변 사람이 도와야=자살은 일단 결심한 사람에겐 떨치기 힘든 유혹이다. 서울아산병원 정신과 홍진표 교수는 "'죽는 게 낫다''죽으면 고통에서 벗어나겠지'와 같은 말을 하거나, 신변을 정리하는 등 자살 단서를 흘릴 땐 무심히 지나치지 말 것"을 강조한다. 그는 또 "불안.초조감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절망감과 비관적 생각이 망상일 정도로 심하거나, 절친한 사람과의 만남도 꺼릴 정도면 즉시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우울감은 정서적 반응이므로 상황이 개선되면 대부분 풀린다. 하지만 우울증은 뇌의 신경전달물질에 문제가 있는 질환이므로 적극적인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우울증은 약물로 잘 치료되지만 약효는 2~3주 후 나타난다. 따라서 환자가 구체적인 자살 의도를 보일 땐 응급 상황이므로 약효가 나타날 때까지 입원시켜 위기를 넘겨야 한다.

'이 세상에 나 혼자 버려졌다'는 극단적 소외감도 자살로 이어지므로 심리적 소속감을 주는 것도 필요하다. 우 교수는 "대가족이 해체되면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지지세력이 없는 것도 자살 증가의 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홍 교수는 "불행한 처지에 놓인 처음 한두 달이 가장 힘든 위기의 순간"이라며 "가족.친구 등이 당사자의 불행을 공감하며 힘이 돼주겠다고 말하면 자살 유혹을 벗어나는 데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황세희 전문기자.의사

# 사례 1 :여자(40), 교사

▶증상:-매사 귀찮아 하며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고 의욕이 없음

-사람과의 접촉을 극히 꺼림

-한 달 전부터 초조감으로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불면증에 시달림

-이유 없이 '나는 아이들에게 백해무익한 자격 없는 교사다' '나란 존재는 주변에 피해만 줄 뿐'이라는 식의 비관적인 생각만 함

-'내 미래엔 희망이라곤 없다'고 굳게 믿음

-최근 들어 입맛이 없다며 식사를 거의 하지 않음

▶진단:자살이 임박한 심한 우울증, 입원 권유

▶경과:다음날 입원 준비하고 오겠다며 귀가 후 새벽에 투신 자살

# 사례 2 :남자(42), 자영업

▶증상:-사업실패로 파산. 빚 독촉에 시달리며 짜증이 많아지고 불안.불면증 등에 시달림

-화를 자주 내자 가족들은 불만을 토로, 부부갈등도 깊어짐

-한 달쯤 지나면서 현실적 고통에서 벗어날 길은 자살뿐이라 믿게 됨

▶진단:위기 상황에서 초래된 자살 유혹

▶경과:-팔의 동맥을 잘라 자살 시도. 가족에게 발견돼 응급실 후송 후 치료

-불면증 등에 대한 약물.정신치료. 가족들이 위로하며 이해심을 보임

-현재 '힘들지만 가족과 함께 시간을 두고 극복하면 되는데 왜 내가 죽을 생각까지 했을까'라며 자활 의지를 보임

# 우울증 환자에서 나타나는 증상

-남들은 즐거워하는데도 무표정하거나 오히려 우울해 보인다.

-집중력.기억력.판단력이 현저히 떨어져 하던 일을 못한다.

-세상만사가 귀찮고 부질없다며 손에서 일을 놓는다.

-세수.식사 등 간단한 자기 관리도 소홀히 한다.

-불필요하게 온갖 일에 대해 부정적 생각을 하며 걱정을 많이 한다.

-지난 일만 떠올리면서 늘 후회하고 서운해 한다.

-자신의 앞날엔 절대 좋은 일이 없을 거라고 말하거나 믿는다.

-자신은 한심하고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식욕이 없다며 하루 종일 거의 안 먹는다.

-걱정과 초조감으로 불면증에 시달린다.

※이 가운데 7개 이상의 증상이 2주 이상 계속되면 약물 치료가 필요한 우울증으로 의심됨.

자료:분당 서울대병원 정신과

# 자살 시도가 의심되는 징조

-자살하겠다는 의도를 직접, 혹은 암시적으로 표현한다.('죽는 게 낫다''나 없어도 잘 살아라' )

-나 자신과 세상, 미래에 대해 지나치게 비관적인 말을 한다. ('나는 어차피 안되는 사람이다')

-가족이나 친지에게 지나치게 '미안하다''내 잘못이다'는 등 죄책감을 표현한다.

-최근 심한 불면증 때문에 거의 못 자는 것 같다.

-식사를 거의 하지 않고 지낸다.

-불안, 초조감 때문에 하루종일 안절부절못한다.

-소중한 물건을 나눠주는 등 신변을 정리한다.

-칼, 치명적인 약(청산가리나 농약) 등 자살 가능한 수단을 옆에 두고 있다.

-정신과 질환(정신분열증, 알코올이나 약물중독 등)이 있는데 최근 우울 증상이 심해졌다.

-불행한 상황인데도 주변에 믿고 내왕하는 사람이 없이 혼자 지낸다.

자료:서울아산병원 정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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