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하나에 감독·선수 운명 갈리는 순간의 드라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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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호 14면

역대 최고 명승부로 꼽힌 삼성과 두산의 플레이오프. 13일 대구에서 열린 5차전에서 이겨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삼성 선수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두산 선수가 고개를 숙인 채 경기장을 떠나고 있다. [대구=연합뉴스]

야구는 가을에 더 뜨겁다.
삼성과 두산이 벌인 2010 프로야구 플레이오프는 명승부였다. 1차전부터 5차전까지 역전과 재역전을 거듭했고, 모든 경기가 1점 차로 승부를 가렸다. 두 경기는 연장 11회 말까지 갔다. 숨 막히는 접전이 이어져 ‘심장마비 시리즈’ ‘노약자·임산부 관람불가 시리즈’라는 농담도 나왔다. 특히 11일 잠실에서 열린 4차전은 예측 불허 포스트시즌의 진수를 보여 줬다. 7-2로 앞선 삼성이 7회 말 2사 후 5실점하며 동점을 허용했다. 정규시즌에서 5회 이후 리드를 잡으며 58승2패(승률 0.967)를 기록한 삼성의 구원투수진이 아웃카운트 1개를 잡지 못해 쩔쩔맨 것이다. 하지만 승기를 잡은 듯하던 두산은 7-8로 졌다.

속절 없이 무너진 최강 삼성 구원투수진
두산은 13일 5차전에서 5점을 먼저 뽑고도 5-6으로 역전패,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삼성에 내줬다. 3회까지 완벽하게 던진 선발투수 켈빈 히메네스의 손가락에 물집이 잡혔다. 4회 들어 흔들리더니 최형우에게 투런홈런을 얻어맞고 강판됐다.

히메네스는 물집이 잘 생기지 않는 투수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투구를 하다가 탈이 났다. 그는 오른쪽 타자 몸 쪽으로 휘는 싱커를 주로 던진다. 그러나 5차전에선 주무기를 쉽게 던지지 못했다. 삼성 타자들은 공에 맞아서라도 출루하겠다는 각오로 타석 가까이 붙었다. ‘맞는 훈련’을 하겠다고 경기 전 테니스공에 일부러 맞기까지 했다. 히메네스는 슬라이더 등 평소 잘 던지지 않던 공을 던지다 물집 때문에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구원투수진이 약한 두산은 역전패했다.

SK 최태원 회장은 2007년 10월 두산과의 한국시리즈를 지켜본 뒤 그 치열함에 놀랐다고 고백했다.

포스트시즌에서는 ‘실금’ 하나 때문에 지진이 난다. 전문가들의 예측은 빗나가는 경우가 더 많다. 2010년 가을, 최강이라는 삼성 불펜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최고 좌타자 두산 김현수가 까닭 모를 부진에 빠져 플레이오프 3차전부터 선발 라인업에서 빠졌다.

국내 포스트시즌은 정규시즌 3·4위 팀 간의 준플레이오프(5전3선승제) 승자가 플레이오프(5전3선승제)에 진출하고, 여기서 이기는 팀이 정규시즌 1위 팀과 한국시리즈(7전4선승제)에서 만나는 시스템이다. 프로야구 8개 팀 가운데 4위에 턱걸이하기만 해도 포스트시즌 10승이면 우승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한국야구 특유의 전쟁 같은 경기가 펼쳐진다. 팬들은 가을에 미친다.

하일성 KBS N 스포츠 해설위원은 “포스트시즌과 정규시즌은 전혀 다르다. 모든 투수를 쏟아 붓고 갖가지 정보를 뽑아내 활용하면 정규시즌에 놓쳤던 특정 타자를 잡을 수 있다. 간판 타자들이 포스트시즌에서 자주 막히는 이유다. 반대로 의외의 스타가 탄생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플레이오프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된 박한이만 해도 지난해 자유계약선수(FA)가 됐지만 불러 주는 팀이 없어 1년 계약만 하고 삼성에 주저앉은 선수다. 정규시즌에서 확실한 주전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김현수는 지난해 롯데와 준플레이오프에서 13타수 7안타(0.538)·2홈런을 때려 냈다. 올해 준플레이오프에서는 같은 상대를 만나 17타수 2안타(0.118)·0홈런에 그쳤다. 야구에서 가을은 이변의 계절이다.

연간 6개월 넘게 진행되는 정규시즌은 일상이다. 오늘 지더라도 내일을 기약하면 된다. 초반 스코어가 벌어지면 포기하는 경기도 있다. 힘을 아끼는 것도 장기 레이스를 풀어 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반면 단기전은 전쟁이다. 공 하나에 선수와 감독의 운명이 판가름 날 수 있기 때문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죽을힘을 다해 뛴다. 웬만한 부상은 티도 내지 못한 채 싸운다. 한 경기를 치르면 일 주일치를 한꺼번에 뛴 것처럼 지친다. 일주일에 6일씩 시즌 133경기를 뛰는 선수들이지만 가을에는 죄다 기진맥진이다.

정규시즌과 비교할 수 없는 장외 열기도 가을야구의 다른 점이다.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도착하는 순간, 평소의 열 배 가까운 취재진에게 둘러싸인다. 평소 듬성듬성 자리를 채웠던 팬들이 가을엔 만원을 이룬다. 홈팀을 향해 일방적인 응원이 쏟아진다. 이런 것들이 선수들에게 약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한다. 단타 하나에 영웅이 되기도 하고, 작은 실수로 역적이 되기도 한다.

나이와 경력은 모자라지만 심장이 튼튼하고 피가 뜨거운 이들이 있다. 2007년 19세 신인 SK 김광현은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두산 에이스 다니엘 리오스와 맞대결, 7과3분의1이닝 1피안타·무실점으로 승리를 이끌었다. 정규시즌 3승에 그쳤고, 한국시리즈 선발로 나올지조차 의문이었던 유망주가 한순간에 폭발했다.

사인 훔치기는 가을의 단골 메뉴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두산은 6-8로 뒤진 연장 11회 임재철의 2타점 2루타와 손시헌의 끝내기 안타로 역전승을 거뒀다. 이때 삼성 2루수 신명철은 “임재철 타석 때 1루 주자 고영민이 사인을 가르쳐 줬다”고 심판에게 항의했다. 1루에서 투·포수의 사인을 훔쳐 타자에게 알려 줬다는 것이다. 논란이 일어나자 오히려 두산 선수들이 “삼성 선수들이 먼저 사인을 훔쳤다. 누상에서 이상한 손동작을 하기에 막았더니 나중엔 발을 구르더라”고 주장했다.

사인 훔치기 논란은 가을야구의 단골 메뉴다. 지난해 KIA-SK의 한국시리즈를 앞두고도 그랬다. 시리즈 전 KIA는 “SK 선수들이 두산과 플레이오프에서 껌 씹는 동작으로 사인을 알려 줬다”고 주장했다. 시리즈 전부터 감정싸움이 벌어졌다. SK는 6차전에서 반격했다. SK 2루수 정근우가 KIA 2루 주자 나지완에게 “네 동작이 수상하다. 사인을 훔치지 말라”고 말했다. 나지완이 이에 맞서면서 두 팀 선수들은 집단 몸싸움 직전까지 갔다.

야구경기 중 벤치 클리어링(벤치에 남아 있는 선수 없이 모두 뛰어나가 싸우는 행위)이 가끔 일어나는데, 가을에는 그 빈도와 강도가 더하다. 양보할 수 없는 승부를 치르며 신경이 예민해져 있기 때문이다.

SK-두산의 2007년 한국시리즈는 벤치 클리어링이 패권을 좌우했다. 두산은 1~2차전을 이긴 뒤 3차전에서 0-9로 지던 중 몸싸움에 휘말렸다. 대개의 벤치 클리어링은 진짜 싸움이 아니라 기세를 내주지 않기 위해 밀고 당기는 선에서 끝난다. 그러나 두산 리오스와 4번 타자 김동주는 지나치게 흥분했다. 결국 1차전 완봉승을 거둔 리오스가 다음 날 김광현과 대결에서 무너졌고, 김동주의 방망이도 식었다. 이기고 있던 두산은 감정적으로 대응했고, 수세에 몰렸던 SK 선수단은 몸싸움을 통해 결집했다. 몸싸움의 배경에는 그보다 더욱 치열한 심리전이 자리하는 것이다. SK는 몸싸움 이후 4연승을 거두며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잠실구장을 찾아 4차전을 관전하고 있었다. 야구단 오너가 보는 가운데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자 SK 구단 관계자들은 크게 당황했다. 그러나 최 회장은 “야구가 이렇게 치열한지 몰랐다. 앞으로 야구단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포스트시즌은 힘의 대결에 정보전과 심리전이 더해진다. 2000년 이전까지는 복마전 양상까지 띠었다. 한국야구사는 1986년 해태-빙그레의 한국시리즈를 이렇게 기록했다. 1차전에서 승리한 선동열은 손가락에 물집이 잡혀 더 이상 등판하지 못할 상태였다. 그러나 선동열은 3승1패로 앞선 5차전 도중 김응용 해태 감독의 지시로 불펜에서 몸을 풀었다. 여차하면 5차전에, 적어도 6차전에는 나올 것이란 시위였다.

당대 최고 투수 선동열을 두려워했던 김영덕 빙그레 감독은 5차전을 이기고도 찜찜한 기분으로 6차전을 맞았다. 그런데 빙그레는 선동열이 아니라 해태의 6차전 선발 문희수에게 완투패를 당했다. 아픈 선동열이 명장 김영덕 감독을 잡은 격이었다.

김응용 감독은 96년 현대와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정명원에게 노히트노런 패를 당한 뒤 “(현대의 연고지인) 인천 출신 심판들이 노골적으로 현대 편을 든다. 이들이 계속 주심을 본다면 한국시리즈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김 감독의 말은 상대 팀과 심판을 동시에 흔들었다. 이후 해태는 5·6차전을 잡고 여덟 번째 우승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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