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87) 지리산을 떠나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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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을 운용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점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사람을 다치게 하는 군사적 행동은 충분한 명분과 원칙을 지키면서 이뤄져야 한다. 그 룰에서 벗어나면, 군사는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줄을 끊는 날카로운 비수(匕首)로 등장하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적 가운데에 섞여 있는 민간인을 어떻게 다뤄야 하느냐는 문제는 매우 높은 사고력을 요한다. 무장하지 않아서 늘 다치기 쉬운 민간인은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다.

1951년 12월에 시작해 약 100일 동안 계속됐던 ‘백 야전전투사령부’의 작전은 그런 점에서 볼 때 상당한 사고력과 주의, 가혹한 무력에 노출되기 쉬운 민간인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따라야 했던 작전이었다. 기간이 짧은 토벌작전에서 흔히 동원하기 쉬운 방법이 초토화(焦土化) 작전이다. 모든 것을 불 질러 없애는 식의 소탕작전이다. 적을 단기간에 궁지(窮地)로 몰아 갈 수는 있지만, 아무런 까닭도 없이 피해를 보는 민간인의 마음을 간과하기 십상이다. 우리는 작전을 시작하면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고려했다. 초토화 작전은 아예 채택하지도 않았다. 국가의 근간인 국민의 마음을 사지 못하면 작전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단기간에 성과를 거둔다고 해도 장기적으로는 피해를 본 민간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어 그들로부터의 진정한 협조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간다. 가장 큰 상처는 어린이들이 입는다. 사진은 1951년 7월 부산의 천막학교. 칠판엔 ‘나무와 풀은 어떻게 살아가는가?’라고 적혔다. 당시 초등 교과서 『과학공부』의 내용이지만, 전란에 휘말린 아이들은 초목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것처럼 읽혀져 애처롭다. 고 이경모씨의 작품으로 『격동기의 현장』(눈빛)에 실렸다.

산에 숨어 있는 적을 치는 것은 기본적으로 평야나 개활지에서 대규모 기동전으로 밀어붙이는 작전과는 다르다. 굴곡이 많은 지형, 빽빽한 수풀 사이를 지나야 하기 때문에 전선이 늘 흩어져 있다. 따라서 통합적인 일괄 지휘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나는 늘 전선을 쫓아 옮겨다녔다. 싸움이 펼쳐지는 현장에 붙어 있으면서 민간에 피해를 주는 섣부른 작전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 작전이 벌어지면서 인명 피해가 많이 난 전투 현장을 늘 찾아다녔다. 현장에서 전투가 어떻게 벌어졌는지를 반드시 확인했다. 군대의 엄정한 군기(軍紀)를 유지하는 데에는 최고지휘관이 현장을 찾아다니는 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백 야전전투사령부’의 100여 일에 이르는 작전이 당시 커다란 민폐 없이 무사히 끝나면서 오늘날까지 특별한 소송 제기나 시빗거리 없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민폐 근절’이라는 대원칙을 제대로 지켰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점에서 나와 함께 작전을 펼쳤던 수많은 백야사 구성원과 미 고문관, 경찰 관계자 등에게 감사하고 있다.

내가 작전을 펼칠 무렵에는 이미 일부 지역에서 양민들이 국군 토벌작전 중 무고하게 희생된 사건들이 벌어진 뒤였다. 국군에 대한 평판이 별로 좋지 않을 때였다. 적을 친다고 나섰지만 단기간의 성과에 집착해 오히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한다면 그것은 대한민국의 군대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아울러 처음엔 소원했던 군과 민간, 그리고 경찰 사이의 관계를 친밀한 관계로 바꿔 효율적인 협조를 이끌어 냈던 점도 성과 중의 하나다. 4개 사단의 병력이 한꺼번에 움직이면서 지상과 공중을 잇는 입체 작전을 훌륭히 펼쳤다는 점도 좋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그것은 그러나 병력을 움직이는 전술적인 차원일 뿐이다. 아무래도 당시의 빨치산 토벌전은 군사와 민사가 한데 섞인 복합 작전임에도 불구하고 민간의 커다란 희생 없이 나름대로 훌륭하게 치러졌다는 점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대한민국의 근간을 위협하는 빨치산의 저항에는 단호하게 대응했다. 우리가 지닌 모든 화력과 병력을 집중해 국가의 근본을 뒤흔드는 빨치산을 소탕하는 데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병의 운용은 본질적으로 흉사(凶事)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런 적에게 대응할 때에는 더할 나위 없는 이기(利器)였던 것이다. 우리는 적을 만나면 가차없이 공격을 가했다. 그리고 그들이 지쳐 떨어질 때까지 쫓고 또 쫓았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쥐었던 무기는 대한민국의 근간을 지키는 훌륭한 도구였다.

병은 놓을 때 제대로 놓고, 쥘 때는 바짝 쥐어야 한다. 깊은 산속에서 잔뜩 웅크린 채 국가와 민족을 뒤집으려는 세력에게는 가혹한 징벌을 가해야 했지만, 그런 분위기에 대충 휩쓸려 갔다가 본의 아니게 적대(敵對)세력이 된 사람에게는 관용을 베풀어야 했다. 돌이켜 보건대, 51년 말의 지리산 일대에서 펼쳐진 ‘백 야전전투사령부’의 작전은 무기를 놓고 쥘 때를 분명히 했던 전투였다. 대상을 정확하게 가려 무력을 사용했고, 그 날카로운 무기의 끝을 겨누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는 귀순과 회귀(回歸)의 여지를 남겨줬다.

6·25전쟁이 벌어지면서 이 땅에는 동족상잔의 참극이 수도 없이 벌어졌다. 대한민국 내부의 좌익들이 활개를 치면서 벌어진 참사도 헤아릴 수 없다. 그런 사건들은 늘 좌익과 우익 사이의 살상과 보복으로 이어져 언제 끝날지 모를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했다.

지리산과 그 주변의 빨치산을 대규모 작전으로 소탕하면서 우리는 그런 반복적인 현상이 다시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한편으로는 적을 집요하게 몰아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포로수용소를 만들고, 민심을 돌리려는 선무공작에 집중했다. 무고하게 사람의 생명을 앗는 행동은 일절 금지했다. 모든 전투 현장에서 이런 사령부의 지침이 100% 지켜졌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과거의 비슷한 작전과 비교해선 이런 전투 방침은 아주 훌륭하게 지켜졌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것은 나름대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성과였다.

우리는 토벌대의 작전에 천근만근의 무게를 실어 신중함에 신중함을 더하도록 했다. 그럼에도, 작전이 펼쳐지면서 몸을 다치고 마음을 상한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 자리를 빌려 그런 모든 이와 그 가족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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